냉동실에서 홍시 한 개를 꺼낸다. 살짝 녹은 후에 아이스크림이 된 홍시를 한 입 가득 베어 문다. 달콤하고 사르르 녹는 시원한 맛을 어찌 글로 표현하랴. 지난해 늦가을에 탁구를 같이하는 언니가 감 고을 영동에서 홍시를 따왔다고 연락을 주셨다. 언니 곁님이 종이상자에 가득 담은 작은 홍시를 주시며 본인이 직접 따셨다고 한다. 온기가 감도는 특별한 선물이었다. 홍시를 보는 순간, 감사의 인사도 잊고 군침이 돌았던 기억을 떠올려본다. 으깨질까 조심조심 꺼내어 다섯 개를 먹었다. 남은 홍시는 아이스크림으로 먹기 위해 냉동실에다 차곡차곡 넣어 보관했다.
어릴 적부터 좋아하던 홍시다. 황혼기가 되니 깊은 맛이 덤으로 온다. 높은 감나무에 고운 감이 옹기종기 매달려 있는 모습을 그려본다. 푸른 하늘 속 보석처럼 박혀있는 모습도 감성으로 피어난다. 찬 서리 맞으며 떫은맛 녹여내고 달콤한 감이 돼 나에게 왔으리라.
단맛으로 삶의 감을 찾아본다. '홍시 다루듯 한다.'라는 말이 있다. 무척 조심스럽게 다루며, 일을 성사한다는 뜻으로 풀어보련다. '홍시 먹다 이 빠진다'는 말을 어머니께 여러 번 들었다. 하찮은 일을 하다가도 화를 당한다며 매사를 '홍시 다루듯' 하라고 말씀하신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저 높은 곳 하늘나라에 계신 친정어머니를 그리며 나훈아 노래 '홍시'를 떠올린다.
나훈아는 부산에서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저음과 특유의 고음으로 매력이 넘치는 가수다. 카리스마로 자기 만의 색을 수놓으며 무대를 장악한다. 대부분의 곡 또한, 본인이 작사하고 작곡한 곡이다. 수많은 곡 중에 '고향역', '홍시', '애정이 꽃피는 시절'은 내가 좋아하며 부르는 노래다. 어머니를 그리며 홍시의 노랫말을 여법하게 담아본다.
생각이 난다 홍시가 열리면/ 울 엄마가 생각이 난다
자장가 대신 젖가슴을 내주던/ 울 엄마가 생각이 난다
눈이 오면 눈 맞을세라 / 비가 오면 비 젖을세라
험한 세상 넘어질세라/ 사랑땜에 울먹일세라
그리워진다 홍시가 열리면/ 울 엄마가 생각이 난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도 않겠다던/ 울 엄마가 그리워진다
생각이 난다 홍시가 열리면/ 울 엄마가 생각이 난다
회초리 치고 돌아앉아 우시던/ 울 엄마가 생각이 난다
바람 불면 감기들세라/ 안 먹어서 약해질세라
힘든 세상 뒤쳐질세라/ 사랑땜에 아파할세라
그리워진다 홍시가 열리면/ 울 엄마가 그리워진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찡하는/ 울 엄마가 그리워진다
이 노래를 부르면 홍시처럼 여리고 선한 어머니가 떠올려지며 그리워진다. 모진 역경을 넓고 관대한 마음으로 자식위해 살아가신 내 어머니, 얼마나 힘이 드셨을까. 하늘나라에 계시지만 감사한 마음으로 더욱 그리워진다. '홍시' 노래를 불러본다. 시나브로 고희를 지나 산수(傘壽) 중간역을 가고 있지만 어머니를 그리는 이 시간이 행복하다.
세월을 가는 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감나무가 크는 걸 본 사람은 없는데 나무는 자란다. 나 또한, 고희를 넘어 모람모람 세월을 간다. 감나무는 녹색 잎이 단풍 들며 욕심 없이 다 떨어뜨리고, 붉은 감만 대롱대롱 달린다. 이 또한 우리가 가는 삶이 아닐까. 홍시가 되기까지 노년의 아름다움이 내 삶이라 상상하며 달떠본다. 감나무를 보라. 맑은 날만 있었을까. 고초만상(苦楚萬狀) 숱한 고비를 넘기며 아름다운 감이 달렸으리라. 홍시가 되기까지 무위자연의 모습으로 묵언수행 하며 기다렸을 터이다.
어릴 적 초등 저학년 시절 추억을 꺼내본다. 감이 좋아 시골 외갓집 광에 갇힌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졌었다. 집안일을 하는 행랑채 머슴 부인이 작은 채반에 홍시 몇 알을 담아 주었다. "더 먹고 싶으면 광에 많으니 달라고 하세요" 하는 말에 살며시 광으로 들어갔다. 장독을 열어보니 뾰주리감이 홍시가 돼 볏짚과 함께 가득 들어 있었다. 감을 꺼내어 게 눈 감추듯 먹고 있을 때였다.
큰 외증조부 기침 소리가 들렸다. 윗말에는 외증조부 쌍둥이가 계셨다. 상투가 큰 할아버지가 큰 외증조부였다. 어린 나는 상투 크기로 할아버지를 구분했다. 증손녀인 내가 왔다는 소식에 아랫말 외갓집으로 오셨다. 증조부가 광 있는 곳을 지나시며, 광문이 열렸다고 빗장을 거는 소리가 들렸다.
상투 큰 할아버지가 어려워 소리도 못 내고 갇히고 말았다. 저녁이 되며 컴컴해지니 무서워 눈물이 나왔다. 그 때 외사촌 동생이 누나를 찾고 있었다. 이 때다 싶어 광문을 두드리며 내 존재를 알리자, 동생이 빗장을 열어 주었다. 지금도 홍시를 보면 외갓집 장독 속에 있던 뾰주리감 홍시 생각이 간절하다.
'세상의 온갖 것에 대해 가지려는 생각을 버린다면, 항상 마음이 편안하며 마침내 근심이 없어진다'는 화엄경 법문을 살펴본다. 욕심이 어리석은 일을 만들고 있다. 홍시로 광에 갇혔던 일 또한 교훈으로 남아 있지 않은가.
달콤한 홍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나훈아의 '홍시'에 꽂혀 불러본다. '생각이 난다. 홍시가 열리면 울 엄마가 생각이 난다' 어머니의 마음을 그립게 표현한 최고의 트로트다. 나훈아는 2024년 2월에 마지막 콘서트를 열며 은퇴를 시사했다. 그는 '여러분 고마웠습니다'로 진심과 사랑, 감사함을 겸손하게 알렸다. 나 또한 홍시를 떠올리면, 울 엄마가 생각이 난다. 어머니의 지혜와 넉넉한 마음까지도 배울 작정이다. 홍시는 때가 되면 달콤하게 익어 떨어진다. 홍시처럼 하심(下心)으로 근심 걱정 내려놓으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