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일보] 올해로 헤이그 특사 사건이 발생한 지 110년이다. 보재 이상설(李相卨·1870~1917) 선생이 순국한 지 100주년이다.
보재 선생은 진천 출신의 애국지사이자 선각자다. 한국 근대사에 뚜렷하고 커다란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그러나 서릿발처럼 냉혹한 유언대로 선생의 기록은 대부분 불태워졌다. 그러다 보니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업적이 많다.
선생은 을사늑약 체결 직후인 1906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했다. 그해 중국 룽징(龍井)에 근대적 학교인 서전서숙을 세웠다. 일제가 국권을 침탈한 뒤에는 유인석·이범윤 등과 함께 '13도의군'을 만들었다.
1914년 연해주에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웠다.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보다 5년 앞선다. 선생의 애국활동은 이처럼 다양했다. 하지만 선생에 대한 평가는 상대적으로 빈약하다. 선생의 유품과 저작이 대부분 불탔기 때문이다.
선생의 마지막 활동지역은 연해주였다. 1860년대 이후 이주해온 한인들이 한인촌을 이루고 살던 지역이다. 고구려와 발해의 영토와 이어진 항일 독립투쟁의 현장이었다. 안중근, 최재형, 이동녕, 홍범도, 이동휘, 신채호 등도 이곳에서 활약했다.
이 지역은 오늘날까지 고려인들의 삶의 터전이다. 연해주에 사는 고려인의 수는 2014년 말 현재 2만9천198명이다. 이중 1만5천여 명이 우수리스크에 살고 있다. 광복회와 고려학술문화재단이 지난 2001년 이곳에 이상설 유허비를 세웠다.
올해는 선생 순국 100주년이다. 진천군은 선생의 다양한 업적을 알리기 위한 사업들을 추진할 계획이다. 오는 4월에는 선생이 항일 독립운동 역사 속에서 이뤄낸 업적과 다양한 학문적 성과를 재조명하는 다양한 기념사업들이 열린다.
이상설선생기념사업회는 오는 3일 기념관 건립사업 모금운동을 홍보하기 위해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내외신 기자회견을 개최할 예정이다. 그리고 7월엔 선생의 고향인 진천읍 산척리 일원에 선생 기념관을 착공할 예정이다.
선생은 이역만리에서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숨을 거뒀다. 생전에 그리도 갈망했던 조국의 광복을 지켜보지 못했다. 광활한 벌판 시베리아 니콜리스크에서 천추(千秋)의 한(恨)을 남긴 채 장렬히 순국했다. 향년 48세였다.
"국토를 잃어버렸는데 어느 곳 어느 흙에 누를 끼치리오"라는 말씀을 남기고 가셨다. 그 후 100년이 지났다. 하지만 망국의 한은 아직 풀리지 않고 있다. 아직도 선생이 꿈꾸던 나라가 도래하지 않은 것 같기 때문이다.
조국 광복이 되고도 70년이 더 지났다. 애절한 심정으로 선생의 순국 100주기를 추모한다. 범국민적인 성원 속에 선생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관이 착공되길 소망한다. 그리고 성공적으로 완공되기를 충심으로 기원한다.
정부와 충북도, 진천군이 진심으로 할 일이 또 있다. 정통은 땅에 묻히고 변통이 득세하는 무도(無道)의 세상이 된지 오래다. 수많은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삶이 궁핍하다. 태어날 때부터 흙수저를 입에 물었기 때문이다.
무도한 세상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보재 선생의 정신에 더 주목해야 한다. 선생은 무도한 세상을 바로잡으려 무던히 애썼다. 선생의 후손들이 흙수저로 살고 있는지 살피는 것도 중요하다. 그저 선생에 대한 숭모나 선생기념관 건립으로 끝낼 게 아니다.
이 기자의 전체기사 보기 →
<저작권자 충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