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한 달이 시작된다. 올 한해의 반이 접히는 달이다.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기다 보면 내가 어디쯤을 흘러가는지 잊을 때가 있다. 문득 자신의 위치를 깨닫고 뒤돌아보았을 때 텅 빈 곳이 느껴지는 건 우리가 본질적인 고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까닭이다. 오래된 시집을 연다. 불에 그을린 듯한 빛깔을 지닌 시집 속에 유월의 푸른 나무들이 서 있다.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
플라타너스,
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
너는 사모할 줄을 모르나,
플라타너스,
너는 네게 있는 것으로 그늘을 늘인다.
먼 길에 올 제,
홀로 되어 외로울 제,
플라타너스,
너는 그 길을 나와 같이 걸었다.
이제 너의 뿌리 깊이
나의 영혼을 불어넣고 가도 좋으련만,
플라타너스,
나는 너와 함께 신이 아니다!
수고론 우리의 길이 다하는 어느 날,
플라타너스,
너를 맞아 줄 검은 흙이 먼 곳에 따로이 있느냐?
나는 오직 너를 지켜 네 이웃이 되고 싶을 뿐,
그곳은 아름다운 별과 나의 사랑하는 창이 열린 길이다.
「플라타너스」전문, 김현승 (김현승 전집, 시인사, 1985)
'고독의 시인'으로 알려진 김현승 시인이 1953년에 쓴 시다.
시는 고독한 인생길에서 동반을 찾은 화자의 모습을 그리며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가운데 살아가는 인간의 운명적인 길을 묘사한다. 플라타너스 길을 걸으며 화자는 나무를 의인화한다. 나무는 "먼 길에 올 제, 홀로 되어 외로울 제" 화자와 함께 "그 길을" 함께 걷는 동반자다. 쓸쓸한 삶의 친구를 '나무'에서 찾은 건 무슨 연유일까. 커다란 잎사귀를 반짝이며 한 곳에 서 있는 나무의 수직성은 흔들리지 않고 변하지 않는 견고함을 갖는다. 나무들은 긴 거리를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늘어서 있다. 그 길에서 화자는 나무들의 총체를 하나의 존재로 인식한다. 화자가 보는 나무는 물리적인 감각만을 가진 나무가 아니다. 플라타너스 전체가 내뿜는 아우라는 힘없는 이에게 신비로운 영적 힘을 붓는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다. 인간은 "신이 아니"며 언젠가는 "우리의 길이 다하는 어느 날"이 온다는 것 그리고 "검은 흙"이 된다는 사실 말이다. 지상에 존재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화자는"오직 너를 지켜 네 이웃이 되고" 싶은 마음뿐이다. 그것이 "아름다운 별과 나의 사랑하는 창이 열린 길"이 상징하는 '가장 순수한 삶'을 지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무는 그늘과 쉼터와 맑은 공기, 새소리의 평안함을 주고 우리는 물을 주고 가지를 쳐주어 잘 자랄 수 있도록 돕는다. 시 속의 '나와 나무'는 상호보완의 동반자적 관계다. 서로에게 위안을 주는 초월한 존재 말이다. 주위를 돌아보라. 지금 내 곁에도 나무와 같은 이가 있으리라. 차가운 내 고독의 손을 잡아줄 따듯한 손을 가진 어떤 사람 말이다.
청주로 진입하는 도로에 심어진 플라타너스 가로수 길은 전국적인 명소다. 여행 후 긴 동굴처럼 뻗어있는 숲길에 진입할 때마다 나는 '고향'에 돌아온 평안과 안도감을 느끼곤 했다. 언제나 그 자리에는 나를 기다려 주는 푸른 나무가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위무가 된 게 아니었을까.
유월이 시작되는 새벽이다. 어느 날 채플 시간에 시만 남기고 갑자기 생을 떠난 시인을 잠시 떠올린다. 그의 시가 영원한 플라타너스가 되어 많은 이들에게 위로를 주리라 생각해 본다. 넓은 잎과 무성한 가지를 가진 무한의 나무가 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