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이 가고 녹음이 더한층 짙어졌다. 식물의 키가 부쩍 자랐다. 숲길을 걸으며 잠시 바깥의 시끄러움을 잊는다. 세계가 소음으로 가득한 건 수없는 욕망이 서로 부딪치기 때문이리라. 숲은 고요하다. 잠시 바위에 앉아 푸르름 속에 잠긴다.
적막이 적막 속으로 파고 든다
적막의 껍질을 깨고 들어선 적막이
다시 고요해졌다
나무는 잎사귀마다
진초록 물을 그득하니 머금고
가끔 기침을 한다
그때마다 적막이 잠시 흔들렸다
길섶 마타리 산초 달맞이꽃 개망초
좁쌀풀 달개비 갈퀴나무들이 줄 지어 서 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호랑나비가 길을 터주는
이천 양돈 연수원 팔월의 오솔길
가끔씩 내뱉는 내 숨결에
적막이 화들짝 놀라 가슴을 쓸어내린다
발자국 소리만
내 뒤를 자꾸만 따라온다
─ 김선진, 「적막에 들다」 전문 (시집 숲이 만난 세상, 시문학사 2011년)
시는 존재화 된 '적막'을 묘사한다. 화자는 홀로 숲을 걷는다. 그의 한적한 보행에 적막이 끼어든다. 새소리나 매미 소리가 들릴 법도 한데 숲은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하다. 화자의 공간적 위치는 밀폐된 숲의 적막 속으로 한정되고, 적막이란 추상명사는 화자의 초월적 사유에 따라 보통명사가 된다. '적막의 껍질을 깨고 들어선 적막이 다시 고요'해지고 주위는 무중력의 우주처럼 고독과 침묵에 젖는다. 가끔 나무가'진초록 물을 입에 물고 기침을 한다.' 중력에 따른 물방울의 낙하 그리고 그 움직임 사이에 존재하는 미세한 음파를 화자는 '기침'으로 인식한다. 아픔을 씻는 몸짓, 정화의 뜻을 지닌 행위다. 그건 움직이지 않는 나무가 발현하는 침묵의 소리이며 주위와 조화를 이룬 적막이기도 하다. 화자 역시 숲을 에워싼 꽃과 풀과 나무처럼 침묵의 존재로 화(化)한다. 화자는 자신의 소음을 지우기 위해 더 깊숙한 숲으로 들어간다. 발걸음은 숲과 숲 사이에 난 길을 잇는다. '내뱉는 숨결'마저 사라지는 불가사의한 적막의 세계. 길은 고요의 극치에 다다른다. 화자는 작은 욕망의 티끌까지 모두 버리고 싶은 게 아닐까. 그리하여 자아의 내면과 비밀의 숲을 잇는 적막 그 자체가 되고 싶은 게 아닐까.
시에 나타난 정중동의 세계는 물질이 우리를 둘러싼 게 아니라, 내면 의식이 물질을 둘러싸고 있다는 신비한 사유 속에 빠져들게 한다. 존재를 잃어가는 인류의 철학, 삶의 전쟁과 평화 사이에 놓인 모호한 경계. 소음과 적막 사이에 놓인 단단한 껍질은 언제쯤 깨질까. 걸음을 떼며 세계와 자아와의 관계에 대한 시인의 질문을 다시금 생각한다. 적막한 숲으로 들어가는 건 새 명상을 꿈꾸는 일이고 자기 회복을 향해 나아가는 길이리라.
숲은 푸른 빛으로 가득 차 있다. 나무 위를 바라본다. 시인이 찾은 적막의 열매처럼 나뭇잎이 반짝인다. 곱고 아름다운 팔월의 초록빛 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