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동계 올림픽이 끝났다. 중국의 편파 판정과 러시아 도핑 파문으로 논란이 많던 올림픽이었다. 반칙하는 중국 선수, 비디오 판독으로 결과를 바꾸는 심판, 터무니없는 판정으로 결승에 진출하는 그들의 경기를 보며 스포츠마저 힘의 논리에 지배받는가 하는 씁쓸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불공정한 결과를 받은 선수들은 조용히 침묵했다. 도핑 의혹이 있는 러시아 피겨 스케이터 발리예바가 빙판에 등장하자, 여러 방송사도 침묵을 지켰다. 살아있는 존재는 언어뿐만 아니라 다른 신호를 통해 의사소통한다. 침묵한다는 건 침묵으로 말한다는 의미다. 때로 침묵은 가장 적극적인 웅변이며 저항이다.
흐느끼는
트럼펫 소리의
금빛 절정
루이 암스트롱의
두툼한 입술
침묵에 대항하기 위하여
또 다른 침묵을 만들고 있는
번들거리는 검은 피부
땀
―'연주' 전문, 허만하
재즈계의 전설인 루이 암스트롱의 트럼펫 연주를 소재로 한 시다. 시인은 '금빛 절정'의 '트럼펫 소리'를 들으며 음을 빚는 연주자의 '두툼한 입술'을 본다. 그리고 '침묵에 대항하기 위하여 또 다른 침묵을 만들고 있는 번들거리는 검은 피부'를 느낀다. 마치 빛을 반사하듯 번쩍이는 혹은 거울처럼 빛을 쏘아대는 그의 얼굴에서 시인은 어떤 언어를 읽는다. 어떤 침묵에 대항하기 위하여 또 다른 침묵을 만드는 걸까. 그러한 연주자의 고뇌와 슬픔을 시인은 단 한 음절의 단어로 압축한다. 얼굴에서 흘러내리는 땀. 그 진한 액체에는 거친 바닥에서 가시넝쿨을 헤치며 살아온 한 인간의 삶이 녹아있다. 시인이 그의 연주에서 찾은 건 삶에서 우려낸 한 방울의 고귀한 '인간 정신' 아니었을까. 연주를 들으며 시인이 감지한 침묵은 '흑인에 대한 차별'을 음악으로 승화한 힘이리라. 시인은 알고 있다. 연주자의 표정과 트럼펫 소리에 담긴 열정 그리고 인내로 가득 찬 평범한 꿈을. 자신의 유명한 노래 'What a wonderful world'의 가사처럼 루이 암스트롱은 누구나 행복하고 차별 없는 아름다운 세상을 갈망했을 것이다.
프랑스 흑인 피겨 스케이터 수리야 보날리가 떠오른다. 1998년 나가노 올림픽 당시 그녀는 한 발로 차며 공중에서 뒤로 도는'Back Flip'이라는 기술을 선보여 관중의 갈채를 받았다. 그 기술은 위험하다는 이유로 ISU에서 금지한 기술이었다. 수리야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흑인이라는 이유로 많은 대회에서 인종차별을 받았던 그녀는 대회의 메달을 포기했다. 그리고 자신만의 독보적인 기술로 '차별과 편견이 넘치는 불공정한 세계'에 대해 항변한 것이었다.
한편, 베이징의 편파 판정에도 우리 선수들은 흔들리지 않았다. 특히 쇼트트랙 1천500m의 황대헌 선수는 압도적인 실력을 입증하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개최국 위주의 차별에 인상적인 종지부를 찍었다. 상식을 벗어나는 행위로 억울한 손해를 입었을 때 당사자는 과정에 대해 '불공정'하다는 감정을 느낀다. 공정이란 상식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올림픽마저 국가적 이기주의에 물든 건 심히 유감스럽고 안타까운 일이다.
허스키하고 감미로운 루이 암스트롱의 노래를 듣는다. 평화롭고 멋진 세상을 향한 노래가 들린다. 모든 예술가와 시인이 꿈꾸는 차별 없고 조화로운 세계는 어디에 있을까. 지금 우리는 멋진 세상을 위한 연주를 하고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