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기의 꿈, 나는 어찌 나를 객토할까

2023.04.23 15:09:10

김정범

시인

인간은 매 순간 모험을 하는 존재다. 꽃을 심거나 길을 걷거나 책을 읽거나 일을 하거나 혹은 잡담하는 순간에도 우리는 모험을 한다. 늘 끊임없이 사유하며 자신과 싸우고 무언가가 되기 위해 변이를 시도한다. 혁명과 창조를 원하는 존재 그게 인간이다.

시집을 읽다 쪽을 넘기지 못하고 잠시 창밖을 본다. 정원관리인은 공지의 땅에 꽃을 심고 있고 문장의 굵은 줄기는 헝클어진 마음을 타고 머리 꼭대기로 올라온다. 시 속의 대칭점에 서 있는 느낌이다. 시집으로 눈을 돌려 다시 시를 읽는다.



어두운 봄밤 천변을 걷다가

땅 흙 갈아엎고 객토한 텃밭 앞에 멈췄다

까만 어둠 속에 황갈색 흙과 검은 객토 반반 섞인 채

겨울을 뿌리부터 파내 던져버리고

새로 맞을 봄 씨앗을 기다리며 맨몸으로 누워있는 땅

지난 봄부터 가을까지 배추며 고추 해바라기에 깻잎과

이름 모를 채소까지 빼곡했던

여름이면 범람하는 흙탕물에 가득 잠겼다가도

물 빠진 뒤 흙 툴툴 털어주면

한 계절 꿋꿋하게 견디던 생명들이 가득하던 땅

제 몸 다 뒤집어 갈아엎고 봄의 씨앗을 기다리며

어둠 속에 싱싱하게 누워 제 속살 솎고 있다

나는 어찌 나를 객토할까

온전한 봄의 햇살과 바람을 안고

봄의 싹 한 조각 받아 안아 틔워내려면

겨우내 찬바람에 메마르고 굳어버린 내 목청과

살아가는 일의 비루함으로 꽁꽁 얼어붙은 내 심장

어찌 갈아엎어야 봄의 노래 한 자락 부를 수 있을까

―여국현, 「객토」 전문 (시집 들리나요, 우리詩움 2022)



객토(客土)는 농지의 질을 개선하기 위하여 다른 흙이나 퇴비를 가져다 넣어 지력을 향상하는 일을 말한다. 화자는 '천변을 걷다가 객토한 텃밭 앞에' 서서 생각에 잠긴다. 흙은 '제 몸 다 뒤집어 갈아엎고 봄의 씨앗을 기다리며 어둠 속에 싱싱하게 누워 제 속살 솎고 있다' 누군가가 생명을 빚어내기 위해 갈아 놓은 흙살이 화자에겐 인식의 전환점이 된다. 속살을 드러낸 흙을 보며 그는 알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것은 생명에 대한 존중과 경외에서 비롯된 마음이다. 화자는 '나는 어찌 나를 객토할까'라고 질문을 하며 자신을 성찰한다. 이화(異化)를 통한 자아의 탈피를 꿈꾸며 '메마르고 굳어버린 내 목청과' '꽁꽁 얼어붙은 내 심장'을 바꾸어 새로운 생명 창조를 위한 마음의 기제로 삼아야 한다는 열망을 갖는다. 시는 삶에 대한 부활의 의지를 전한다. 화자는 자기 몸과 마음을 갈아엎고 봄의 햇살과 바람을 받아들이며 희망의 씨앗을 심어 새 삶을 시작하고 싶어 한다. 시 속에 숨은 시인의 긍정적 사유는 타자의 욕망과 의지를 자기 변화의 계기로 삼아 '재탄생'과 '갱신'의 전환점을 지향한다. 자연의 힘을 인식한다는 건 우주의 진리를 깨닫는다는 걸 의미한다. 그리고 그건 자기 혁명에서 비롯한다.

삶과 존재의 아름다움은 그냥 찾아오지 않는다. 야생에서 자란 꽃이나 나무는 풍파를 이기며 자란다. 하지만 인공화원의 적절한 온도와 습도의 균형 속에 자란 식물은 외부에 노출되면 쉽사리 시든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겨우내 웅크리고 인공의 안락함에 젖어있던 자아는 정체한다. 갈아엎는 마음이 필요한 시간이다. 자생력을 가진 건 자연이나 인간이나 같다. 마음의 봄을 가꾸려면 정신의 흙을 갈아엎고 회복의 꿈을 꾸며 뜨거운 삽질을 해야 한다. 그리하여 어딘가로 또 다른 모험을 떠날 수 있다. '나는 어찌 나를 객토할까' 큰소리로 허공에 말해본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 '봄의 노래 한 자락'이 들린다. 속살을 뒤집어엎는 열정은 짧은 순간의 절망을 모두 녹일 것이다. 회복기의 꽃들도 지금 도처에 피어나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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