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불고 비가 흩뿌린다. 태풍이 온다는데 건너편 집이 이사한다. 어디로 가는 걸까. 꿈에 그리던 집으로 가는 걸까. '이사할 때 비가 내리면 부자가 된다'라는 속설이 있다. 손수레로 이사하던 시절의 이야기로, 땅이 젖어 바퀴와의 마찰이 적어지므로 물건이 부서지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한다. 실상 우중 이사는 고생스럽다. 짐이 젖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고 몸이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을 통해 가족 간 사랑과 자신이 가진 것의 의미를 절실히 깨닫게 되지 않을까, 그래서 이사 후에는 좀 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부자의 삶을 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문득 위태로워 보이는 사다리차를 보며 시 한 편을 떠올린다.
오늘은 얼마나 아래로 흘러왔을까
저번같이 비가 내린다
이삿짐을 부려놓고
눅눅한 이불에 기대어 쓰린 위를 달랜다
잔잔한 물보라에도 흔들리는 수생의 바탕은
어두운 블루
젖은 몸이 자꾸 아래로 가라앉는다
얼음의 계절엔 겹겹이 퇴적되어
바닥에 누워있지만,
언젠가는 물비린내 진한 부력으로 떠올라
연못 가득 보랏빛 꽃을 채우겠지
뿌리 내리기엔 너무 먼 물의 땅
그 아래엔 다시 하늘이 있고
열어젖힐 창문이 있는지,
달은 차오르는지
―「부레옥잠」 전문, 경기명
시는 '수평적 아래의 삶'과 '수직적 아래의 삶'에 대하여 잔잔하게 이야기한다. 화자의 삶은 원치 않는'아래'로 자꾸 흘러가는 삶이다. 화자가 '뿌리 내리기엔 너무 먼 물의 땅'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 삶은 낙관적인 게 아니라 불가항력적 힘에 밀려 어디론가 흘러가는, 소외된 삶이다. 떠도는 자의 '젖은 몸'은 노력을 해도 '자꾸 아래로 가라앉는다.' 낮고 침침한 곳에서 화자는 체념한다. '이삿짐을 부려놓고 눅눅한 이불에 기대어 쓰린 위를 달래'며 모든 것을 내려놓는다. 이럴 때 체념은 하나의 빛과 같다. 체념의 빛! 바닥에 닿은 자가 기다리는 최후의 반등. 그것은 선택할 여지가 없는 자의 마지막 자세다. 화자는 자기 삶을 '수생'이라고 규정지으며 '언젠가는 물비린내 진한 부력으로 떠올라 연못 가득 보랏빛 꽃을 채울' 것이라는 꿈을 꾼다. 시는 뿌리 없이 떠도는 지하 빌라의 삶에도 '하늘'이 있고, '열어젖힐 창문'이 있고, 어둠 대신 때때로'달이 차오른'다는 희망을 열어둔다.
부레옥잠은 물 위를 떠다니며 살지만, 생명력이 매우 강한 식물이다. 물과 햇빛만 들면 잘 자란다. 잎자루가 둥글고 그 안에 공기가 들어있어 쉽게 물 위에 뜰 수 있다. 이름 그대로 '부레'를 달고 있는 '옥비녀'다. 부레옥잠은 여러 개의 꽃말을 가지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승리'다. 아마도 시인이 소망하는 궁극적 주제일 것이다. 그 승리가 상처투성이이거나, 혹은 너무 작아 보잘것없을지라도 삶을 이끌며 미래를 여는 나침반임엔 틀림이 없으리라.
올해는 여러 차례 태풍이 오고 예기치 못한 폭우가 자주 쏟아졌다. 그 피해는 준비할 수 없었던 가난한 사람들에게로 향했다. 삽시간에 지하 방으로 밀려든 홍수에 삶의 '바탕'을 잃은 사람들. 때때로 자연은 지극히 불공평하다. 어떤 이가 더 큰 욕망을 채우기 위해 날뛰는 사이, 다른 이는 단지 살아남기 위해 싸운다. 하지만 승리하는 삶은 많은 걸 소유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인간적 삶을 살기 위해 분투하는 정신에 있다.
물 위를 정처 없이 떠다니는 부레옥잠. 모두 '보랏빛 꽃'을 피우기를 희망한다. 더 깊고 굵은 뿌리를 내리기를 그리하여 끝내 승리하는 삶을 이루기를 기원한다. 태풍이 몰아치고 비가 쏟아져도 그 꽃의 영혼은 분명 꿋꿋하게 피어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