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말·말 그리고 시

2022.08.21 14:27:05

김정범

시인

새 시집을 읽는 건 새 사람을 만나는 일처럼 가슴 뛰는 일이다. 김규화 시인의 신간 시집을 읽고 있다. 말(言)과 말(馬)과 말 (名言)을 소재로 한 55편의 시가 담겨 있다. 구조의 꼼꼼함과 치밀함이 눈에 띈다. 시의 질료는 언급한 세 종류의 말이다. 시를 보며 독특한 문양과 외형을 가진 집들을 방문한 기분이 든다. 시인이 콜라주 한 언어의 집은 세계 곳곳에 지은 집이고, 시간을 초월하여 지은 집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시공간에 사는 말은 야생성과 인간성 그리고 신성과 진리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실험적 시편 가운데, 시집 말미를 장식한 시 한 편을 소개한다.

당신 몸의 살로 살쪄 있을 거

당신 몸의 다리가 되어 매달려 있을 거

당신의 입에 재갈로 물려 있을 거

당신의 등받이에 안장을 달아줄 거

"문학은 말의 춤, 언어의 무용이다. 같이 뛰고 놀자"는 김진우의 말

당신은 나와 함께 쌍생아로 살 거

당신은 나와 이별할 수 없을 거

당신은 나의 입에서 훈민정음 소리를 내게 할 거

당신은 나를 무등태워 흰 이와 잇몸을 내놓으며

노래하게 할 거

당신은 나의 애물

―「말이 말한다」 전문, 김규화 (시집 말·말·말, 시문학사 2022)

이런 애절한 사랑이 있을까. 내용상으로 시는 고백 형태를 띠고 있다. 애모하는 이에게 보내는 '영원한 사랑의 고백'이다. 화자는 '어떤 존재와의 일체감'을 강렬하게 소망한다. 도대체 누구길래 그의 '살'로 '다리'로 존재하고 싶은 것일까. 그리하여 '함께 쌍생아로 살며', 절대 '이별할 수 없는' 걸까.

시집 속에서 '말'이라는 기표(significant)는 뛰고 구르며 세 가지 기의(signifie)를 시 속에 숨겨둔다. 중첩한 의미 때문에 가볍게 보면 '읽어내기'가 어렵다. 예컨대, 위 시의 제목 '말이 말한다'는 '언어가 시인에게 말을 한다'라는 뜻과 '말(馬)에게 말한다'라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즉, 두 개의 고백이 한 편의 시 속에 중첩하여 존재한다. 궁극에 말은 명사(名士)의 말(名言)과 합쳐지며 새로운 말인 시(詩)의 구조를 완성한다. 따라서 시 속 화자의 정체는 바로 '언어'이다.

시의 주제로 보이는 '문학은 말의 춤, 언어의 무용이다. 같이 뛰고 놀자'라는 구절을 보며, 순수한 야생의 힘을 가진 원초적 언어와 문학에 대한 시인의 사랑을 느낀다. 그 사랑은 소리나 물결의 파동과 같이 시각과 청각을 통해 들어와 가슴에서 입체적으로 울린다. 시집 속의 시를 깊게 읽으려면 현대의 언어학, 철학, 세계역사와 지리, 동물학 그리고 시론에 대한 이해가 조금 있어야 하지만, 그러한 지식에의 탐구는 또 다른 기쁨이 된다.

시의 해석은 읽는 이의 경험, 지성과 감성, 그리고 읽는 순간의 어떤 영감에 따라 달라진다. 그래서 같은 시라도 읽을 때마다 다른 느낌이 들 수 있다. 좋은 시란 그런 시가 아닐까. 인용한 시처럼 읽을수록 새로움을 느끼는 시 말이다.

얼마 전, 다른 시인들과 함께 김규화 시인을 만났다. 그녀는 시문학사를 50년 넘게 이끌어 온 강철의 여인이다. 노시인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사람의 아름다움은 내면의 깊은 곳에서 새어 나온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는 한강 변의 그 카페가 멈춘 듯 느껴졌다. 가끔 어느 찰나는 영원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영원은 다른 영원으로 이어진다. 결국 시인의 언어에 대한 통찰은 시와 문학을 향한 불변의 사랑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인간은 말과 함께 살아간다. 우리가 뱉은 말은 무형의 파동이 되어 우주도서관 어딘가에 존재한다. 그 도서관은 발아의 씨앗이며 동시에 열매다. '말할 때 새어 나오는 한 줌의 입김이 말 없는 세상을 눈처럼 덮는다'(「펠 펜 포니」,발췌)라는 문장에 밑줄을 긋는다. 태초의 신비로운 언어는 우리 안에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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