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LD & NEW - 연극인생 30년 이승부·신인배우 윤종수

2011.01.16 20:10:54

편집자주

오래 묵을수록 장맛이 좋다고 했던가. 그 오랜 시간에는 케케묵은 추억들이 주저리주저리 맺혀있을 것이고, 긴 시간 외롭게 싸우는 동안 노하우도 생기기 마련이다. '예술가들의 인생'을 장맛에 비유해 본다. 다년간 쌓아온 경험이 실력이 되고 어느새 대중들에게 사랑받는 존재로서 자신의 이름 석 자를 각인시키게 된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고 나면 또 어느새 그들의 이름 석자는 대중들의 기억에서 멀어지고 말 것이다. 누구에게나 처음이 있다. 그렇기에 과도기가 있고 끝이 있는 것처럼 'OLD & NEW'를 통해 예술가들의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35년 연극외길 걸어온 이승부

"나이 50이 넘어서야 연기의 맛이 무엇인지 조금씩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관객들이 선호하는 흥미 위주의 작품도 좋지만 인생의 깊이가 있고 내면의 혼이 담긴 연기를 펼치는 그런 배우가 되고 싶어요. 그럼 이제부터가 제 인생 최고의 전성기가 시작 되는 건가요?(웃음)"

올해로 연극인생 35년을 맞은 연극배우 이승부(52)씨.

지난 1975년 첫 연극무대에 오른 이래 지금까지 단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작품 활동에 참여해 온 그다.

'이·승·부'라는 이름 석 자에는 충북연극계의 전설 같은 역사가 담겨있다.

한때 전국에서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던 배우들의 호시절과 연극계의 불황으로 무대를 떠나야 했던 배우들의 고단했던 시련기 등 들으면 들을수록 그들의 세계에 빠져들고 만다.

"이제부터가 '인생 최고의 전성기'가 될 것"이라는 그의 연기 인생을 들여다본다.

△배우인생을 걷게 한 영화 한편

"3남매 중 장남이었는데 부모님께 불효하는 아들이었지요. 교사나 공무원이 되기를 원하셨던 부모의 반대에도 배우가 됐으니 말이에요. 전 초등학교 때부터 장래희망이 뭐냐고 물으면 무조건 배우였어요. 늘 TV에 나오는 주인공 역할을 하는 것이 제 유일한 놀이였거든요"

괴산이 고향인 그는 중등시절 배우학원을 다닐 정도로 연기에 대한 꿈이 남달랐다.

이후 청주에서 고교시절을 보내며 그야말로 영화광이 돼 연기에 대한 꿈으로 학창시절을 보냈다.

"청주시내 모든 극장 상영 프로그램이 머릿속에 입력돼 있을 정도로 영화에 미쳐있었어요. 주위 모든 사람들이 영화에 관한 것은 저한테 물어보는 편이 빠를 정도였으니까요. 고입시험을 치른 1973년이었을 거예요. 당시 청주 현대극장에서 이소룡의 '용쟁호투'를 상영했는데 온몸에 전율이 올 정도로 멋있더라구요. 그래서 배우의 꿈을 키우고 본격적으로 연극을 시작했지요"

그가 본격적인 연기수업에 들어간 것은 서울예술대학에서 입학하면서부터다.

동기들과 연극무대에 서면서 연기에 대한 매력에 흠뻑 빠져있을 때 남학생들의 필수코스인 군대를 가게 됐다. 3년이 지나 연극무대에 다시 선 것은 청주의 소극장무대에서다.

"청주에 내려와 소극장을 들어갔는데 연극을 하더라구요. 청주에도 연극을 하는 곳이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어요. 그리고는 저도 무대에 서기 시작했는데 당시 활동하던 동년 배우들(박천하·박종관씨)과 뜻이 맞아 상당극회라는 극단을 만들게 됐지요"

당시 이씨는 연극 프로그램을 소개하는데 포스터에 배우들의 얼굴을 넣고 홍보하는 파격적인 시도를 한 인물이다. '서울물'좀 먹은 이씨의 아이디어가 확실한 관객몰이의 뒷받침이됐다.

△내 인생 최고의 전성기와 암흑기

악극 '울어라 박달재야'에서 열연중인 이승부(왼쪽)씨.

"80년대 중후반부터 90년대까지 배우들의 인기가 대단했어요. 당시 극장 너름새에서 주로 공연을 했는데 좁은 공연장에 300여명을 앉히고도 200명이 밖에서 줄을 설 정도였으니까 한 작품 당 5천여명이 관람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한 사람이 6번을 보기도 하고 한 학교당 1천여명이 왔으니까요"

당시 배우들의 인기는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다고 한다.

이씨가 팬레터가 1박스씩을 받고 시내에 나가면 여학생들이 소리를 질러대 그야말로 목에 힘주고 다니던 시절이었다고 했다.

이 같은 인기는 1992년 그의 이름을 걸고 기획, 제작, 연출, 배우라는 1인 4역을 시도하게 만들었다. 서울에서 크게 흥행하던 '돼지와 오토바이'라는 작품이었는데 '1만원'이라는 파격적인 관람료까지 무기한 공연이 시작된 것이다.

공연이 이어질수록 흥행여부는 처참해졌다. 청주 연극이 관객들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처음 패배의 고통을 맛 본 그는 '인기란 한순간의 물거품'과 같다고 절감했다.

그리고는 한동안 배고픈 예술가의 길을 걸으며 연극배우에 대한 회의를 갖기도 했다.

그가 절망의 늪에서 헤어 나와 지금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배우는 무대에 서 있어야 배우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부터다.

△"우리 속에 갇힌 사자는 더 이상 사자가 아니다"

"잘 나갈 때는 양 다리가 부러져 무대에 설수 없는 상황임에도 휠체어를 타고 무대에 오를 정도로 열정이 있었어요. 돌이켜 생각해보니 좋은 상황이건 나쁜 상황이건 다 소중한 경험이 됐더라구요. 전 지금 제 자신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된 상황이 얼마나 소중한 삶인지 몰라요. 배우로서의 삶도 고된 시련을 이기고 나야 제대로 된 연기 인생을 펼칠 수 있는 것인가봐요"

그는 모진 시련과 고통을 겪고 나서야 자신을 알게 됐다고 한다.

그리고는 "우리 속에 갇힌 사자는 더 이상 사자가 아니다. 더 이상 이빨과 발톱을 갈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마지막 남은 아날로그 예술 '연극'을 지키기 위한 배우의 자존심이 담긴 말이다.

"어려워진 연극계 현실에 문예진흥기금이 순간의 돌파구가 됐지만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던 시절 빚을 얻으면서까지 애정 어린 작품을 만들어 내던 연극쟁이들의 열정이 사라질까 우려스러워 지네요"

그는 '배우다운 배우, 작품다운 작품을 만들어 내는 것'이 배우의 길이라고 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연극계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쓴 소리와 거침없는 조언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배우인생 40, 50, 60년 그 이후에는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궁금해 진다.

2010 충북 신인연기상 윤종수

"아직 신인인 저에게 있어 배우라는 정의를 내리기가 가장 어려운 것 같아요. 무대에서 다른 사람의 인생을 연기하며 거짓말을 한다고 해야 할지, 다른 사람의 인생을 대변해 자신의 내면에 진심을 보여준다고 해야 할지…. 그래도 내 인생 마지막엔 백발의 노신사로 무대에 서 있는 배우의 모습이길 희망합니다"

2010년 충북연극제에서 작품 '마술가게'로 신인 연기상을 수상한 윤종수(25)씨.

젊은 층 연극배우들이 부족한 충북연극계에 신선한 활력소가 되고 있다.

떠오르는 연극계의 신인 '윤·종·수'라는 이름 석 자에는 충북 연극계의 미래가 달려있다.

큰 포부로 들어선 배우의 길 인 만큼 해야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많은 신인배우, "부족하지만 선후배들에게 존경받는 배우로 남고 싶다"는 그의 야심찬 이야기를 시작해 본다.

△배우 이범수의 등장 연극학도 꿈꾸는 계기

"연극하게 된 계기가 우스울 수도 있는데…. 고등학교 때 청주 세광고를 다녔거든요. 야간자율학습까지 모두 다 받고 나름 열심히 공부했는데 어느 날 영화배우 이범수 선배가 모교를 방문한다는 소식이 들렸어요. 당시 지금의 인지도는 아니었는데 후배들 앞에서 자신이 가고 있는 길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열정적인 모습으로 말씀하시는 모습이 제 안의 무엇인가를 마구 흔들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막연하게 연기자가 되기로 결심했고 곧바로 연기학원에 등록한 것이 계기가 됐어요"

청주출신 이범수의 모교 방문이 연극배우의 꿈을 심어준 계기가 됐다는 그는 배우가 되겠다는 막연한 생각에 1년 반 동안 연기를 준비하게 됐다.

"연기학원이 서울에 있어서 주말에만 올라가 특별반수업을 들었거든요. 한창 입시 준비할 때라 오전수업은 빼먹을 수 없으니 오후부터 밤늦게까지 연기수업을 몰아 받고 찜질방서 새우잠을 잤던 기억이 나네요"

여느 부모와 달리 윤씨의 부모도 배우가 되겠다는 그의 꿈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평범한 길을 두고 어렵고 험한 배우의 길을 가겠다는 아들의 결심에 마음이 아팠기 때문이다.

그러던 부모님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한통의 편지였다.

"부모님의 절대적인 반대에도 청주대 연극학과에 입학하게 됐어요. 입학 후 부모님께 그동안 감사했던 마음과 앞으로의 제 포부를 담은 글을 진심 어린 마음으로 써 내려갔는데 많이 감동 하셨나봐요. 지금의 부모님은 저의 영원한 후원자이자 연극학도로서의 꿈을 키울 수 있도록 아낌없이 배려해 주신 인생의 은인이세요"

그가 정식 연극무대에 선 것은 청주대 소극장에서 공연한 '혈맥'이라는 작품이다.

이후 여러 작품을 선후배들과 함께 했고 2006년 극단 시민극장의 '브라이튼의 해변'이라는 작품에서 '유진'이라는 배역을 맡은 것을 계기로 극단 시민극장의 배우가 됐다.

△배우의 길은 서로를 맞춰가는 일련의 작업

연극 '마술가게'에서 열연중인 윤종수(오른쪽)씨.

"아직 많은 작품에 출연한 것은 아니지만 연극을 하면서 가장 보람됐던 것은 배우들과 함께 작품을 준비하고 무대에 올리는 과정인 것 같아요. 각기 다른 사람들이 모여 서로 부딪치고 알아가고 맞춰가면서 사람간의 미묘한 공감대가 형성되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한편으론 자기가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좋아하는 사람하고만 작업 할 수는 없다는 것이 가장 어려운 점이기도 해요"

그는 사람관계에서도 그렇지만 배우들 간 충돌이 원만하게 절충되지 못한 채 작품이 무대에 올려 졌을 때 아쉬움이 남는다고 했다. 그래서 항상 좋았던 기억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좋았던 기억이 많고 서로간의 희망을 확인하면서 연극을 계속하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배우는 무대에서 거짓말을 한다(?)

"배우를 정의하기가 어렵다니까요? 무대에서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라고 치면 관객들은 그 거짓말을 믿으며 극적 환영을 믿는 거잖아요. 배우로서의 제 삶은 남의 인생을 통해 관객들에게 그 환영에 대한 꿈을 대리만족시켜주는 그런 존재가 되고 싶은 거예요"

다른 사람이 되어 자신의 인생이 아닌 남의 인생으로 관객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이야말로 배우의 매력이라고 말하는 윤씨.

그는 미래의 중후한 아저씨가 된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고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무대에서 진정한 배우로 거듭나는 모습을 떠올린다.

"언제나 예고되지 않은 막막한 길을 가고 있지만 가끔 나의 모습을 그릴 때 나는 계속 무대에 있을 것이고 연기 경험을 발판으로 연출가로서의 꿈도 펼쳐보고 싶습니다. 앞으로 청주연극발전에 도움이 되는 배우 또는 연출가가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며 저 또한 저의 모교에서 또 다른 누군가의 마음에 희망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는 배우가 되고 싶습니다"

/ 김수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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