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고 살기

2024.07.15 14:53:12

최창중

전 단양교육장·소설가

옛날에 고을 원님이 무사 한 사람을 데리고 민정 시찰을 나갔습니다. 갑자기 비가 쏟아지고 날이 저물어 갈 길을 잃게 되었습니다. 추위와 배고픔에 지쳐 정처 없이 헤매고 있는데 멀리 외딴집의 작은 불빛이 보였습니다. 그곳에는 늙은 노부부가 가난하게 살고 있었죠. 갑자기 원님이 나타나자 노부부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습니다. 원님을 호위하는 무사가 주인 부부에게 빨리 먹을 것을 대령하라고 재촉했기 때문입니다.

방에 앉은 원님이 문구멍으로 밖을 내다보니 주인 영감이 홍시를 혀로 핥고 있었습니다. 먼지 묻은 홍시가 물에 잘 씻기지 않자 혀로 핥았던 것입니다. 홍시가 원님 앞에 놓였습니다. 원님은 홍시 껍질이 잘 벗겨지지 않자 워낙에 배가 고팠던 터라 영감이 핥은 홍시를 껍질째 먹어 치웠습니다.

다음에는 감자와 옥수수가 나왔습니다. 그것도 꿀맛이었습니다. 다음에는 보리밥이 나왔습니다. 원님은 역시 허겁지겁 먹었습니다. 처음 먹어보는 보리밥이 그렇게 맛이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배가 터지도록 먹은 원님은 이제 식곤증을 느꼈습니다.

그때 주인 영감이 씨암탉을 잡아 가지고 왔습니다. 농촌에서는 귀한 손님이 오면 닭을 잡아 바치는 것이 최고의 대접이었죠. 김이 모락모락 나는 닭은 너무도 먹음직스러웠지만, 원님은 배가 너무 불러 더 이상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조금 먹어보았지만 별맛이 없었습니다. 심하게 식곤증을 느낀 원님은 바로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아침이 되어 원님이 주인 영감에게 물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은 무엇인고?"

"예, 배고플 때 먹는 음식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맛없는 음식은 무엇인고?"

"예, 배부를 때 먹는 음식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깨끗한 음식은 무엇인고?"

"예, 모르고 먹는 음식입니다."

원님은 무릎을 탁 쳤습니다. 농촌에서 가난하게 사는 무식한 영감이 그처럼 명쾌한 답을 할 줄은 몰랐던 것입니다.

비가 그치고 길이 뚫리자 원님은 주인 영감에게 후한 상을 약속하고 떠났습니다. 후일 영감은 상으로 받은 돈으로 많은 논밭을 사 잘 살았습니다.

송일호 소설가의 '그때 그 시절'이라는 단편소설에 소개된 이야기입니다. 이어진 작품 속에서 작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제일 맛있게 먹어본 음식은 벼 베기가 한창일 때 어머니가 이고 오신 들밥이었다고 술회합니다.

작업복 차림 그대로 배고픈 시간에 황금 들판에 앉아 해콩이 섞인 햅쌀밥에다 참기름에 달달 볶은 살찐 메뚜기 반찬과 함께 막걸리 한 사발을 쭉 들이켜면 꿀맛이었다는 것이지요. 점심을 먹은 뒤 돌베개를 하고 나무 그늘에서 낮잠을 한숨 자고 나면 금상첨화였다고 덧붙입니다.

그는 한때 빵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밤이 되면 쥐들이 빵 공장으로 모여들어 엿을 녹인 드럼통에 빠져 죽는 일이 허다했습니다.

죽은 쥐를 건져내는 것이 그의 담당이었죠. 쥐를 건져내면 털은 쏙 빠지고 속살만 딸려 나왔습니다. 손님들이 그 빵을 맛있게 먹는 것을 보면 구역질이 났다고 했습니다. 정말 세상사 모르고 사는 게 제일 편하다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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