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려

2023.01.09 17:00:08

최창중

전 단양교육장·소설가

고려의 명장 강감찬 장군이 귀주에서 거란군을 대파하고 돌아오자, 현종은 친히 마중을 나가 얼싸안으며 환영했습니다. 그날 저녁, 왕궁으로 초청해 중신(重臣)들과 더불어 주안상을 성대하게 베풀었습니다. 한창 주흥(酒興)이 무르익을 무렵, 강감찬 장군은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더니 소변을 보고 오겠다며 자리를 떴습니다. 나가면서 장군은 내시에게 따라오라는 눈짓을 은밀하게 했고요. 시중을 들던 내시가 그의 뒤를 따랐겠지요. 강 장군은 내시를 자기 곁으로 부르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여보게. 내가 조금 전에 밥을 먹으려고 밥그릇을 열었더니 밥은 없고 빈 그릇뿐이더군. 도대체 어찌 된 일인가? 내가 짐작하건대 경황 중에 서둘다보니 누군가가 실수를 한 모양인데 이걸 어찌하면 좋겠는가?"

순간 내시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습니다. 이만저만한 실수가 아니었기 때문이지요. 그날의 주빈(主賓)이 강감찬 장군이고 보면 그 죄를 도저히 면할 길이 없을 듯싶었습니다. 내시는 땅바닥에 꿇어 엎드려 부들부들 떨기만 했습니다. 이때 강 장군이 말했습니다.

"성미가 급한 상감께서 이 일을 아시면 모두들 무사하지 못할 테니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기왕에 내가 소변을 본다는 구실을 붙여 자리를 잠시 비웠으니 서둘러 다른 밥그릇을 준비해 내가 자리에 앉거든 밥이 식은 듯하니 따뜻한 밥으로 바꿔 주겠다고 하면서 다른 밥그릇을 가져다 놓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내시는 너무도 고맙고 감격스러워 어찌할 바를 몰라 했습니다. 그 일에 대해 강 장군은 끝내 함구했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입은 내시는 그 사실을 혼자만 담고 있기 아쉬워 동료에게 실토했고, 이야기는 끝내 현종의 귀에까지 들어갔습니다. 훗날 현종은 강 장군의 인간됨을 크게 치하해 모든 사람의 귀감으로 삼았습니다.

강감찬 장군의 배려가 돋보이는 일화입니다. 배려란 다른 사람의 처지와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 그 사람과 같은 입장에 서 보는 것이죠.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대방을 이해한다 하면서도 실은 자신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생각하고 판단하기 마련입니다. 목소리가 온화한 사람이 소리를 치면 메아리도 온화한 목소리로 되돌아오는 법입니다. 모습이 단아한 사람은 그림자도 단정하기 마련이고요. 세상만사가 다 자신의 업(業)입니다. 먼저 베풀고 배려하면 그 이상의 모습으로 돌아오기 마련입니다.

농부가 달팽이를 불에 굽기 시작했습니다. 달팽이들이 뜨거워 몸을 비틀며 내는 소리를 듣고 농부가 말했습니다.

"자기 집에 불이 났는데 춤을 추다니. 바보 같으니."

이솝우화 '달팽이와 농부'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배려와는 거리가 먼 농부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한 남자가 깜깜한 밤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맞은편에서 맹인이 등불을 들고 걸어왔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남자는 맹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앞을 못 보는데 왜 등불을 들고 가십니까?"

맹인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보지 못하지만 눈뜬 사람들은 맹인이 걸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지요."

탈무드에 나오는 배려입니다.

어떤 랍비가 말했습니다.

"내일 아침은 여섯 사람이 모여 회의를 합시다."

그런데 이튿날 일곱 사람이 왔습니다. 랍비는 참석할 여섯 사람의 얼굴을 일일이 알지 못해 말했습니다.

"여기에 참석한 사람 중 필요 없는 분은 돌아가 주시오."

그러자 자리에 꼭 있어야 할 사람이 일어나 나가 버렸습니다. 그는 잘못 나온 사람이 굴욕감을 느끼지 않도록 자신이 나갔던 것입니다. 역시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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