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설(瑞雪)이길 기대하며

2021.01.03 15:14:27

최창중

전 단양교육장·소설가

도저히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 코로나며, 앞날이 캄캄한 이 나라의 경제며, 시정잡배처럼 아귀다툼을 일삼는 정치며, 듣도 보도 못한 사고가 끊임없이 터져 나오는 이 사회며, 눈에 뜨이는 모든 것이 답답하고 속 터지게 느껴져, 순백의 눈이 펑펑 쏟아져 내렸던 지난 연말, 나이를 잊은 채 일부러 차를 몰고 나가 청주시의 외곽을 세월아 네월아 느긋하게 돌았습니다. 만류하는 아내를, 체인이 트렁크에 있음을 알려 억지로 안심시키고는 조수석에 앉힌 채.

하늘의 솜 공장에 구멍이라도 난 듯 한도 끝도 없이 눈이 쏟아져 내리더군요. 눈이 적은 겨울이었는데 그동안 아끼고 아끼던 눈을 한꺼번에 쏟아 붓는 것인지 풍성하게 내렸습니다.

차창으로 굵은 눈발이 소낙비처럼 쏟아져 들어왔지요. 중공군의 인해전술을 연상시킬 정도로 악다구니를 쓰며 달려들었습니다. 와이퍼는 진드기처럼 눌어붙는 그것들을 쉴 새 없이 걷어냈고요.

한참을 달리자 직선으로 뻗은 가로수길이 나타났습니다. 잿빛 하늘이 땅에 닿을 듯 가까이 내려와 있었습니다. 체인을 감지 않은 터라 유리알처럼 반질반질한 빙판길을 조심조심 갔습니다. 안개등을 밝힌 상대편의 차량이 눈에 닿을 듯 가까이 다가와야 비로소 차종을 식별해낼 수 있을 정도로 가시거리가 짧았습니다.

가로수의 바깥쪽으로는 들판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눈발이 거센 들판은 그대로 회백색을 흠뻑 뒤집어 쓴 한 폭의 한국화였지요. 그림은 희뿌연 공간에 없는 듯 조용히 버려져 있었습니다.

눈은 잠깐 잠깐 게으른 모습으로 바람 타는 연처럼 여유 있게 흔들리며 내려오다가도 잠시 후에는 할 일을 잠시 잊었다는 듯 다시금 심한 바람에 얹혀 맹렬하게 차창을 때리곤 했습니다. 좌우로 규칙적으로 도열한 가로수들이 슬로비디오처럼 뒤로 뒤로 흘러갔지요.

와이퍼가 만들어 내는 부채꼴 모양의 전면 유리창에 시골 마을이 웅크린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우윳빛유리 속의 상(像)인 듯 회색을 잔뜩 뒤집어 쓴 쓸쓸한 모습이었습니다. 마을을 지나는 동안에는 하늘이 조금 희뿌예지면서 눈발이 가늘어지는가 싶더니 마을을 벗어나자 다시금 낮게 내려앉으며 세차게 쏟기 시작했습니다. 마음을 다잡아 신경줄을 팽팽하게 잡아당긴 채 조심스럽게 길을 짚어 나갔습니다.

차창에 부옇게 김이 서리곤 했지요. 그때마다 히터를 창으로 작동했습니다. 119 구급차의 경고음이 들리더군요. 눈을 들어 시선을 멀리 주니 안개인 듯 구름인 듯 부옇게 번진 눈발의 덩어리 속에 희미한 경광등이 나타났습니다. 평소 같으면 호기롭게 질주해 와 바람처럼 옆을 스쳐 갔을 터인데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그쪽도 별 수 없이 엉금엉금 기면서 느릿느릿 다가왔다가는 느릿느릿 지나갔습니다. 다시금 숨죽인 채 엎드린, 마른침을 꿀꺽 삼켜야 할 것 같은 정적이 다가왔지요.

새로운 마을이 나타났습니다. 눈밭에 아이들 서넛과 개 너덧 마리가 나와 뒹굴고 있었습니다. 이제나저제나, 세상이 아무리 수상하게 변한다 하더라도, 아이들의 눈으로 보면 눈꽃이 가득 핀 세상은, 하늘나라의 선녀님이 하얗고 하얀 꽃가루를 자꾸자꾸 뿌려 주는, 즐거움만이 가득한 공간이겠지요.

무겁게 내려앉은 하늘이 손을 뻗으면 만져질 듯했습니다. 뜯다 말아 너덜너덜해진 이불솜을 펑퍼짐하게 널어놓은 듯한 잿빛 하늘에서는 여전히 제 몸무게를 못 이긴 솜조각들이 쉴 새 없이 지상을 향해 곤두박질치고 있었습니다.

다가오는 새해에는 이 나라에, 내 가정에, 오로지 좋은 일만 가득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많은 눈이 쌓인 위험한 도로를, 내리는 눈이 서설이길 기원하며 그렇게 천천히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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