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감이 끊기고 / 정신이 냉소의 눈에 덮이고 / 비탄의 얼음에 갇힐 때 / 그대는 스무 살이라도 늙은이가 되네 / 하지만 머리를 높이 들고 / 희망의 물결을 붙잡는 한 / 그대는 여든 살이라도 늘 푸른 청춘이네~' 미국 시인 사무엘 울만(Samuel Ullman)이 쓴 <청춘(Youth)>이라는 시의 끝부분이다. 이게 78세에 쓴 시라고 하니 '늘 푸른 청춘'을 노래하는 시인의 모습이 참 정겹다.
그런데 그게 어디 쉬운 일일까.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이루어지는 건 늙어가는 것밖에 없다고 했다. 그 증상은 시시각각 나타나 온몸을 들쑤셔대기 일쑤다. 숙취가 머무는 시간이 전보다 훨씬 길어졌다.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가 일어날 때는 끙, 소리가 저절로 나온다. 면도기로 코밑을 밀다가 거울에 비친 얼굴을 들여다본다. 끔찍하다. 세상에, 피부의 윤기와 탄력이 떨어진 게 한눈에 들어온다. 이마의 밭고랑과 코 양옆으로 그어진 팔자주름의 골이 깊다.
그동안 뭐 하나 제대로 이룬 것 없이 나이만 먹어가는 것 같아 좀 우울해진다. 비누 거품이 묻은 거울을 씻어내고 욕실을 나오면서 사무엘 울만을 다시 떠올린다. 슬기로운 늘그막 생활은 '비탄' 대신 '희망의 물결'과 함께해야 이룰 수 있다는 걸 그는 <청춘(Youth)>을 쓰면서 다함께 노래하고 싶었던 걸까. 그걸 다시 곱씹어 읽으면서 나는 또 습관처럼 '신포도' 같은 위안거리를 찾기 바쁘다.
윤동주 시인은 스물일곱 살에 세상을 떠났다. 서른 살에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 의사는 겨우 서른한 살에 남의 땅 뤼순 감옥에서 순국했다. 다초점 렌즈의 도움 없이는 책 읽기가 불편해지기 시작한 40대 중반 무렵 어느 날부터, 참 기특하게도 나는 그런 생각을 해왔다. 그게 요즘에는 이런 식으로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나는 어느새 윤동주 시인보다 30년도 넘게 살았다. 안중근 의사하고 비교해도 마찬가지다. 미국 애플사를 창업해서 매킨토시 컴퓨터 등 혁신적인 기술과 디자인을 갖춘 개인용 컴퓨터를 개발했고, 아이폰을 통해 전 세계에 스마트폰 시대를 가져온 스티브 잡스보다도 이미 10년 가까이 더 살고 있지 않은가.
어느 도서관 입구에 캘리그라피 된 '설레어라 청춘아'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춘다. 거기 적힌 두 어절을 '두근두근 청춘아'로 바꿔 읽으면서 사무엘 울만이 노래한 '늘 푸른 청춘'의 해답을 찾는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저 유명한 <귀천(歸天)>이라는 시의 마지막 연이다. 쉰 살에 이 시를 쓴 천상병 시인은 예순셋 이른 나이에 하늘로 돌아갔다.
누구나 공평하게 나이를 먹는데, 혼자만 늙어가는 줄 착각하고 한숨이나 쉬고 앉았으면 뭐할 것인가. 마지막 남은 달력 한 장을 바라보면서 이제부터는 발상을 전환하기로 한다. 한탄할 시간 있으면 천상병 시인이 노래했듯, 들에 나가 풀잎에 맺힌 이슬의 영롱한 빛깔을 한 번이라도 더 들여다보기로 했다.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이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설레는 가슴으로 매일 새벽빛을 맞이하기로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