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칠한 아기와 절세미녀

2024.10.06 16:06:11

송준호

우석대 문예창작과 교수

"자기네 집 애가 까칠하니까 어쩌라는 거지?" 일행 중 한사람이 그렇게 말했다. 바로 앞차 창유리에 붙어 있는 짧은 문구 때문이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공교롭게도 바로 옆에 나란히 서 있는 차에는 '꼬마 공주들이 타고 있어요!!'라고 적혀 있었다. 그 두 개의 문구에 대고 곱지 않은 눈길을 보냈던 모양이다.

자동차에 '초보운전'을 적어 붙이고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그게 '어제 면허 땄어요', '양보해주셔서 감사합니당∼', 'sorry 장롱면허' 따위로 '진화'한 게 엊그제 일 같다. 그런 문구는 운전이 서툰 이들에게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까칠한 아기'나 '꼬마 공주'는 그런 것하고 목적이 좀 다른 건 사실이다.

아무튼 '진화'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꽃미녀 탑승 중임 예쁘게 봐주세용'이나 '절세미녀가 타고 있어요!' 같은 것도 본 적 있다. 설마 그걸 읽은 어느 남자를 유혹하겠다고 그런 걸 일부러 적어 붙였을까. 하긴 고속도로에서 내 차를 지그재그로 추월해서 순식간에 멀어져가는 '어르신께서 운전하고 계심'도 본 적 있다.

구조주의 언어학의 창시자로 알려진 로만 야콥슨(R. Jakobson)은 언어의 기능을 여섯 가지로 나누어 설명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친교의 기능'이다. 친한 사이에 주고받는 인사말이 대표적인 예다. 친교의 기능을 수행할 때는 말에 담긴 정확한 뜻은 중요하지 않다. 친근감을 표시해서 서로의 관계를 돈독히 한다는 데 목적이 있다.

"작은아버지, 안녕하세요· 어디 다녀오시는가 봐요." "우리 조카가 몰라보게 예뻐졌는데?" 이런 식으로 인사말을 주고받는 건 아주 흔히 있는 일이다. 동문서답이 분명한데, 이런 게 바로 친교 기능이 발현된 언어라는 말이다.

안녕하시냐고, 어디 다녀오시느냐고 묻는 조카에게 작은아버지는 그의 외모를 칭찬했다. "내가 안녕한지 정말 궁금해서 묻는 거냐?"라거나, "어른이 어디를 다녀오든 무슨 상관이냐·"라고 되묻는 작은아버지는 없다. 물론 "제가 여쭙는 말에는 대답해주시지 않고 어떻게 그런 성폭력적인 말씀을 하세요?"라고 따지는 조카도 없을 것이다.

앞서의 '까칠한 아기'나 '꼬마 공주'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꽃미녀 탑승중임'이나 '절세미녀가 타고 있어요!'라고 적어 놓았다고 앞차의 문을 함부로 열어서 운전하는 여자가 정말로 '꽃미녀'나 '절세미녀'인지를 확인하려고 드는 사람 또한 아무도 없을 것이다.

보기 나름이다. 듣기에 따라 그 안에 담긴 뜻도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배배 꼬인 눈동자에서 힘을 조금만 빼면 된다. '까칠한 아기'든 '꼬마 공주'를 자랑하든 정겹게 받아들이면 그만이다. 그런 아이가 차 안에 정말로 있는지 확인할 필요는 더욱 없다. 젊은 엄마의 안전 운전을 배려해주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지 않은가.

'내가 타고 있지롱∼ 운전은 안 하니까 걱정하지마^^'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나오다가 어느 경차 유리창에 이렇게 적힌 걸 보고 빙긋 웃으며 지나친 적이 있다. 그 문구 옆에는 기저귀를 차고 젖병을 문 아기의 모습까지 앙증맞게 그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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