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갑지 않은 손님이었다. 여러 날 묵었으니 이제는 눈치껏 알아서 좀 가주었으면 했다. 마침 비가 내리고 있었다. 집주인이 지나가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자, 이제 그만 가라고 가랑비가 때맞춰 오시는가?" 그 소리를 듣고 손님이 슬그머니 맞장구를 쳐주는 척하며 이런 식으로 딴청을 부리는 것이었다. "아, 가지 말고 더 있으라고 오늘은 이슬비가 내리는구나."
'봄비 속에 떠난 사람 / 봄비 맞으며 돌아왔네 / 그때 그날은 그때 그날은 / 웃으면서 헤어졌는데...' 나뭇잎을 때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이은하라는 가수가 허스키한 목소리로 아주 오래전에 불렀던 <봄비>의 한 대목을 흥얼거리다가 실없이 웃는다. '가랑비'가 내려서 하는 수 없이 떠난 사람이 '이슬비'를 맞으며 돌아왔다는 걸까를 생각하면서….
그게 그것인 것 같아도 가랑비하고 이슬비는 다르다. 가랑비는 이슬비보다 물 알갱이가 조금 더 굵다. '가라는 비'라고 발음이 비슷하다 해서 가랑비에 손님을 내보내는 게 야박한 까닭이다. 혹시 '있으라는' 이슬비라면 몰라도….
가늘게 뿌리는 빗방울 모양이 안개처럼 보이는 건, 말 그대로 '안개비'다. 그보다 물방울이 굵고 이슬비보다 가는 비를 '는개'라고 부른다는 걸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으리. 아무튼 빗방울의 굵기로 아래부터 순서를 따지면 안개비, 는개, 이슬비, 가랑비가 되는 것이다.
내리는 조건이나 모양에 따라 붙여진 이름도 있다. 굵은 빗줄기가 허공을 후려갈기듯 마구 쏟아지는 건 '채찍비'다. 그보다 더 거세게 내리는 건 '작달비'이고, 그게 마치 양동이로 물을 퍼붓는 듯하면 '억수비'다. 물줄기가 장대처럼 보인다 해서 '장대비'라고도 부른다.
'소낙비'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사춘기에 접어든 산골 소년과 서울 소녀의 해맑고 풋풋한 마음을 길어다 쓴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하고 같다. 조인성하고 손예진이 주연한 영화 <클래식>의 모티브가 된 소설이기도 한다. '여우비'는 햇빛 밝은 한낮에 잠깐 뿌리는 비를 일컫는다. 호랑이 장가간다고들 하는 바로 그 비다.
계절에 따른 비도 있다. 겨울철, 거센 바람에 함부로 흩날리며 떨어지는 눈을 '눈보라'라고 부르지 않던가. 그렇게 쏟아지는 비를 가리키는 말 또한 '비보라'다. 빗방울 대신 봄날 벚꽃처럼 바람에 꽃잎이 날리는 건 당연히 '꽃보라'다. 꽃잎이 흩날리듯 곱게 떨어지는 건 '꽃비'다. 비가 오기 시작하는 걸 알리느라 후두둑 소리를 내며 땅을 때리는 빗방울을 가리키는 말은 '비꽃'이다.
무더운 여름 한나절만이라도 고단한 농사일에서 잠시 놓여나 낮잠이나 실컷 자두라고 내리는 비는 말 그대로 '잠비'다. 그 농부들의 애간장을 태우는 오랜 가뭄을 속 시원하게 해갈시켜주는 건 '단비'다.
사시사철 가리지 않고 비만 내렸다 하면 마음부터 설레는 이들이 있다. 술꾼들이다. 그들 대부분의 가슴에 그득한 빗물 같은 슬픔을 어루만져 주는 '술비'는 종류를 가리지 않는다. 안개비든 가랑비든 이슬비든, 채찍비든 작달비든 장대비든, 꽃비든 잠비든 비보라든, 모두 가뭄에 내리는 단비 같은 술비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