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라는 말을 가장 자주 써왔지 싶다. 대중가요 가사를 두고 하는 말이다. 누군가를 애틋하게 그리워하면서 몹시 좋아하는 마음을 가슴 속에 품으면 절절한 사연도 저마다 달리 표현하게 되는 건가.
숯검댕이 눈썹 나훈아는 낮게 깔리는 특유의 음성으로,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눈물의 씨앗이라고 말하겠'다고 노래한 바 있다. 이름조차 정겨운 '옥분'이라는 이름의 가수는 음정을 조금 위태롭게 흔들면서 '향기로운 꽃보다 진한 바보들의 이야기'라고 하지 않았던가.
끊어질 듯 말 듯한 허스키 음색과 어우러져 한결 애잔하게 다가왔던 장은숙의 <사랑>은 커터 칼에 베인 듯 손마디가 쓰리고 가슴 깊은 곳까지 아리다. 이별의 아픔이 오죽했으면 세상에 다시 태어나 사랑이 찾아오면 가슴을 닫고 돌아서 오던 길로 가리라고 했을까.
살아오는 동안 누군들 심장이 찢어질 것 같은 이별의 고통을 한두 번쯤 겪어보지 않았으랴. 이런 노래는 속울음을 삼켜가며 불러야 하리. 그 아팠던 기억을 떨쳐내느라 아랫입술을 깨물어야 하리. 제아무리 몸부림쳐도 이별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는 동서고금을 가리지 않고 세월만 한 것이 없더라는 말에 동의한다. 트로트 가수 송대관이 부른 노래 제목 <세월이 약이겠지요>처럼.
'If you do not love me / I love you enough for both!' 푸른 동해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강릉 안목해변 어느 카페 벽에 손 글씨로 적어 붙인 영어 문장을 보았다. 첫 문장의 뜻은 금방 와 닿았다. 그런데 다음의 'enough for both'에서 눈길이 멈칫거린다. 그 뜻을 제대로 살려 번역해내기가 만만치 않다. 학창시절 영어공부가 얼마나 부실했는지를 새삼 깨닫는 순간이다.
둘을 위해 충분히? 그렇게 사랑한다고? 왠지 어색하다. 과감한 의역이 필요했다. 'both'는 분명 '나와 그대'일 터…. 아하, 바로 그거였다. '만약 그대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 내가 그대 몫까지 사랑하겠어요.'
무릇 사랑이란 'as you want' 혹은 'It's up to you'라고 번역되는 '너의 뜻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 자식에게든 연인에게든 이웃에게든 내가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것. 그걸 기꺼이 실천하는 것. 누군가를 마음 깊이 사랑한다는 건 그러므로 스스로 '바보'가 되어야 가능한 일. 문득 눈앞에 어른거리는 이들이 있다.
'바보'로 불리는 걸 기꺼이 즐거워했던 김수환 추기경은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다. '사람 사는 세상'을 꿈꾸다가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우리 곁을 홀연히 떠났던 그 '바보'의 투박한 얼굴도 있다. 퍽 쑥스러워하는 낯빛으로 통기타를 어설프게 퉁기면서 음정박자 아랑곳하지 않고 그가 부르던 <상록수>가 파도소리와 어깨동무하고 내게 다가오는 것 같았다.
생각이 거기에 이르고 보니, 사랑하다 헤어지면 다시 보고 싶고, 당신 없인 아무것도 이젠 할 수 없어서 사랑밖에 난 모른다고 했던 심수봉의 노래 <사랑밖에 난 몰라>를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고 있는 것이었다, 이토록 아름답고 풍성하게 익어가는 가을날 오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