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 내 가슴에 서성거린다. /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황지우 시인의 시 <너를 기다리는 동안>의 머리 부분이다.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조차 나를 만나러 오는 너의 발소리인 것으로만 여겨져 가슴이 두근거릴 만큼 세상에서 나를 가장 설레게 만드는 것, 바로 너를 기다리는 일 아니고 무엇이랴.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처럼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목 놓아 울어야 하고, 무서리 내리는 밤을 꼬박 밝혀야 노란 꽃잎을 피울 수 있듯, 살아가는 모든 시간은 기다림의 연속인 것, 기다리지 않고 이루어지는 게 어느 것 하나 없을지도 모르는 것, 기다림이란 본디 그런 것인데….
어렸을 때는 소풍날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곤 했다. 날짜가 다가올수록 설레는 마음은 풍선처럼 커졌다. 그런 기대는 떠나기 전날이면 곧 터져버릴 것처럼 부풀었다. 밤잠을 설치는 날도 제법 있었지 싶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막상 떠난 소풍은 한마디로 그저 그랬다. 적잖이 먼 길을 계속 걸어야 했으니 애꿎은 다리만 아팠다. 어머니가 조금 특별하게 싸주신 도시락을 까먹는 것 말고는 프로그램도 허술했다. 돌아올 무렵이면 온몸이 고단했다.
더 큰 아파트에 입주할 내일을 기다리는 오늘은 고달프지 않다. 새로 계약한 차를 가지러 나선 발걸음은 얼마나 가뜬하던가. 꿈에 그리던 크로아티아 여행 스케줄을 잡아놓고 캐리어를 사러 가는 기분은 또 그 무엇에 비할 수 있을까. 그 또한 뻔하다. 어릴 적 소풍하고 크게 다를 바 없다. 이사한 아파트가 당장은 운동장처럼 넓어 보여서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아도 그런 즐거움은 오래가지 않는다. 새로 출고된 자동차의 푸근한 승차감이나 '신차 냄새' 또한 금세 무뎌지기 마련이다. 크로아티아의 낭만적인 정취도 TV로 보았던 것에 훨씬 못 미칠 때가 있다.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 나는 세 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오래전에 <어린왕자>에서 읽은 이 짧은 몇 마디 말이 어느 카페 벽에 캘리그라피 되어 있었다. 그 옆에 서 있는 어린왕자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이 말 다음에 어떤 대사가 이어졌던가를 검색해 보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이 행복해지겠지. / 네 시가 되면 나는 흥분된 마음으로 / 내가 얼마나 행복한지 너에게 보여주게 될 거야.' 네 시가 가까워질수록 설레는 마음이 더욱 커지는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네 시가 되어 너의 눈동자를 바라보는 순간의 기쁨과 환희는 어떤 말로 다 형용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 다섯 시가 되고 여섯 시가 되면 그때는….
'그 다방에 들어설 때에 내 가슴은 뛰고 있었지 기다리는 그 순간만은 꿈결처럼 감미로웠다'라는 나훈아의 노래 <찻집의 고독> 한 대목을 흥얼거리다가 나는 두어 달 전에 읽은 짧은 시 한 편을 떠올렸다. '매화꽃이 피면 / 그대 오신다고 하기에 / 매화더러 피지 말라고 했어요 / 그냥, 지금처럼 / 피우려고만 하라구요' 이건 김용택 시인이 쓴 <매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