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연말, 음치·몸치는 괴롭다 … 송년의 절규

"개인기 강요가 싫어요"

2007.12.29 15:07:46



회사원 전모(33·고양시 덕양구)씨는 연말로 접어들자 머리가 지끈지끈하다 못해 편두통이 생길 지경이다. 회사 전체 송년회에 부서별 송년회, 동창회, 거래처 사람들과의 술자리 등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 데다 올해는 지난 8월 결혼한 부인의 모임에까지 얼굴을 들이밀어야 할 판이다. 이런 모임에서 빠지지 않는 코스가 노래방. 음치인 전씨에게는 노래방에서의 한두 시간이 악몽(?) 같다.

전씨는 "언제 나한테 노래를 시킬까 눈치를 보며 박수만 두 시간을 치고 있는 모습이 한심하다"며 "그렇다고 즐거운 모임에서 인상을 쓸 수도 없고, 노래방 가기 전에 혼자 빠져나올 수도 없고 정말 죽을 맛이다"고 고충을 털어놨다.

영업부서에서 근무하는 박모(29·여·안산시 상록구)씨는 회사 송년회가 하루하루 다가오는 게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목줄을 죄어 오는 것 같다.

박씨 회사의 송년회는 전통적으로 팀별 장기자랑으로 마무리된다. 이미 다른 팀에서는 개그 프로그램 패러디나 상종가를 치고 있는 원더걸스의 '텔 미' 춤을 연습한다고 법석을 떨고 있다.

음치에 몸치인 박씨지만 팀 내 유일한 여성인지라 뭇 남성 직원들의 기대와 일명 '장기자랑 떠넘기기'는 부담스럽기 그지없다. 올해는 뭐라도 보여주겠다는 생각에 두어 달 전부터 혼자서 노래를 연습하고, 동영상을 보며 안되는 춤이라도 춰보려고 나름대로 발악을 했던 박씨. 하지만 송년회 날짜가 다가올수록 걱정은 태산처럼 쌓여갔고, 원래 안되는 노래와 춤은 더욱 엉키고 있다.

박씨는 "연말만큼 노래 잘하고 춤 잘 추는 사람들이 부러울 때가 없다"며 "이 회사를 다니는 한 앞으로도 매년 연말에는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앞이 캄캄하다"고 말했다. 또 "왜 장기라는 게 춤과 노래, 성대모사 등으로만 압축되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며 "송년회 대신 원유유출로 피해를 입은 태안으로 봉사활동을 하러 가고 싶다"고 털어놨다.

회사원 뿐 아니라 개인기가 없는 대학생들에게도 연말은 괴롭다.

소위 쫑파티나 동기모임, 학과 및 동아리 송년회에 크리스마스 파티 등 개인기를 발휘해야 할 자리가 한두 곳이 아니다.

K대 3학년 A씨는 "수십명이 모여 있는 시끄러운 자리에서도 말 한마디로 모두를 웃길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정말 좋겠다"면서 "장기자랑이 시작되면 아무것도 보여줄 게 없어 차라리 혼자서 술을 들이붓고 취해버리는 게 속 편하다"고 말했다.

각종 모임이 집중되는 연말이다. 최근에는 술잔을 꺾고 문화공연을 관람하거나 봉사활동으로 송년회를 대신하는 기업이나 단체 등이 늘어나고 있지만 그래도 아직은 술자리가 대세다.

으레 음주가무와 함께 송년회 자리를 장식하는 장기자랑도 빼놓을 수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한해를 즐겁게 마무리하고 희망찬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 마련된 송년회가 일부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가하는 장으로 다가오고 있다.

특히 '엔터테인먼트 지수(Entertainment Quotient:이하 엔큐)'가 사회생활에서 성공할 수 있는 새로운 능력으로 떠오르면서 개인기가 부족한 사람들이 설 자리는 점점 더 좁아지고 있는 분위기다. 넘치는 끼와 개인기로 조직 내에서 성공신화를 일궈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대중매체를 통해 소개되는 것도 엔큐가 부족한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든다.

지난 24일 포털사이트 다음(Daum)에는 '개인기 없는 사람들은 연말 회식자리가 두렵다'란 블로거의 글이 게재돼 관심을 집중시켰다.

이 블로거는 "연말 회식자리에서 마음이 피폐해진다"며 "장기자랑을 강요당할 때의 심정은 정말 1년 동안의 스트레스를 다 받는 느낌이다"고 적었다.

또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는지 차라리 개인기 강요가 없는 일본이나 유럽, 미국에서 태어났으면 하는 생각도 있다"면서 "깔린 멍석 위에서 멋지게 재주를 부리는 사람이야 좋겠지만 멍석 옆에 앉아 바닥에 그림이나 그리는 사람들은 연말 회식자리가 괴롭다"고 밝혔다. 이 글은 이틀 만에 2만건 가까운 높은 조회수를 기록하며 동병상련의 상황에 몰린 누리꾼들의 공감을 이끌어냈다.

아이디가 '소심'인 누리꾼은 "완전 동감이다. 야근하는 것보다 회식자리에서 분위기 좀 띄워보라고 할 줄도 모르는 개인기 강요받는 스트레스가 백배 더 심하다"는 댓글을 달았다. '선진국민'이라는 누리꾼은 "노래방이 필수인 우리나라의 회식문화는 삼류다. 하기 싫은 사람 억지로 시키고 제대로 분위기 못 맞추면 사회생활 못하는 것으로 치부한다"고 성토했다.

사람들을 즐겁게 만드는 개인기가 경쟁력으로 인식되는 시대.춤과 노래, 성대모사 등의 개인기가 떨어지는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무능력한 사람으로까지 몰릴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과연 개인기가 없는 게 정말로 무능력한 것일가.


기사제공:노컷뉴스(http://www.cbs.co.kr/noc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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