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한 전시회에서 알게 된 화가가 있다. '도마뱀에게 물린 소년'이라는 그림이었는데 빛의 묘사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이 그림을 그린 화가는 자신의 고향인 이탈리아의 카라바조를 본명처럼사용한 '미켈란젤로 메리시'가 본명인 바로크 거장 카라바조(1571-1610)다. 아무리 봐도 결코, 평탄한 삶을 살지 못했던 천재 화가. 화가로서의 삶과 생활인으로서의 삶이 너무나도 달랐다.
그런 카라바조가 400년을 돌고 돌아 바로크 화가들과 함께 한가람 미술관에 왔다. 카라바조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한마디로 그는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나쁘게 말하면 이중적 범죄형 인간이라고 해야 할까. 15번의 수사 기록, 7번 투옥될 만큼 그의 내면은 이성과 충동이 들끓었던 사람이었다. 어찌 보면 선과 악이 내면에서 피 터지게 대립했던 남자. 그럼에도 어떻게 명작을 남길 수 있었을까. 비록 살아선 내면의 갈등과 들끓음으로 사생활이 혼란스러웠으나 타고난 예술 재능과 내면에 내재해 있던 인간에 대한 따듯함이 존재했기 때문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는 빛과 어둠에서 드러난 인간의 리얼한 모습을 비출 수 없었으리라. 심지어 살인을 했음에도 그의 재능이 너무 안타까워 뒤로 지원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도망 다니는 슬픈 말로였지만….
암튼 이날, 가장 인상 깊게 봤던 작품이 '그리스도의 체포'다. 이 그림은 종교 개혁 후 형식의 신(神) 대신 성경 위주의 신앙을 주창한 신교에 몰리는 신자들을 붙잡기 위해 구교에서 적극적으로 퍼트렸던 종교화 중 하나다. 특히 이 작품은 예수의 모습을 신격화 하지 않고 한 인간의 모습으로 표현한 카라바조 그림의 특색을 가감 없이 보여주고 있다. 우피치 박물관 소유로 그림엔 체포하는 자, 도망가는 자, 친한 척하는 자 등 다양한 인간 군상의 표정이 당시 상황을 리얼하게 표현하고 있다.
먼저 예수의 표정을 본다. 신이 아닌 한 인간의 리얼한 표정이다. 만찬 이후 겟세마네 동산에서 자신의 운명을 피하고 싶은 인간적인 불안과 체념이 가득하다. 예수를 등지고 도망가려는 요한의 모습도 있다. 그는 예수가 가장 사랑했던 제자 아니던가. 또 예수 옆 유다의 갈롱스런 표정과 몸짓 그리고 반대 오른쪽 세 명은 체포하러 온 경비병들인데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법대로만 처리하려는 경비병들의 무지막지한 모습도 묘사되어 있다.
가롯 유다의 간사하고 오만한 몸짓을 본다. 예수의 제자면서 스승을 팔아 넘긴 배신자가 아닌가. 그가 경비병들에게 예수를 알리는 신호로 키스를 하려 한다. 이때 이마는 배반에 대한 고통과 불안으로 주름져 있으나 얼굴은 태연한 척하고 있다. 더구나 예수의 어깨를 잡은 그의 손이 예수를 결박하려는 의도를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다. 반면, 등불을 들고 예수의 체포 상황을 호기심 많은 얼굴로 관찰하고 있는 사내가 바로 카라바조 자신이란다. 혹, 자신이 등불을 밝히는 사람으로 살고 싶었던 바람을 나타낸 건 아닐까.
마지막으로 미술적 표현이 기가 막히다. 작품 정중앙을 마치 십자가처럼 가로지르는 경비병의 금속성 갑옷. 어깨에서 팔뚝에 이르기까지 섬광과 같은 빛이 마치 칼끝처럼 예수의 목을 향하고 있는데 어찌나 사실적, 정교하게 빛을 잘 묘사했는지 감탄이 절로 나온다. 마치 빛을 지금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누구도 따라올 수 없다고 평가되는 빛의 명작이다.
그림의 여러 인간상에서 혼란한 한국 사회가 떠오른다.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우린 소유와 존재 중 무엇을 소중히 여기고 있는지. 어떤 상황에서도 기본을 지키고 본질을 직시하고 있는지. 때로 그림 속 요한이, 유다가, 경비병이 내 안에서 꿈틀거린 적은 없었는지. 나는 어떤 유형? 오늘은 그림에 현실을 이입해 보는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