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境界)역에서 서성이다

2017.12.03 14:54:18

홍성란

수필가

숨만 쉬면 살아있는 걸까. 가깝게 지내는 지인들은 아니라고 한다. 자신의 의지대로 살지 못한다면 타인에 이해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신세에 불과 할 것이니 살아있다 말 할 수 없다는 뜻일 것이다.

며칠 전 골목길에서 일이다. 한 노인이 친구인 듯 노인을 배웅하고 있었다. 노인은 멀어져가는 노인에게 "죽으면 못 봐, 자주 놀러 와"라고 하신다. 죽으면 당연히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그럼에도 죽으면 못 본다는 당연한 그 말이 왜 그토록 깊은 울림을 주는 걸까.

그날도 그 작은 역으로 가는 중이었다. 죽으면 못 본다는 말의 의미를 곱씹게 하는 역(驛). 날마다 찾아가도 늘 안타깝고 쓸쓸하다. 집에서 그곳까지 걸리는 시간은 30여분 왕복 시간 빼고 그곳에 머무는 시간은 2시간 안팎이다. 역은 시내 복판에 있다. 그곳에 역이 있다는 걸 사람들은 알고 있지만 대개 힐끗 쳐다보곤 무심하게 지나쳐 간다. 하얀 페인트칠을 한 건물은 겉으로 보면 순백의 희망처럼 보이지만 역사(驛舍)로 들어서면 어떨 땐 죽음처럼 너무 고요해서 이곳이 삶과 죽음의 경계(境界)역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주 든다.
이곳 역에는 기차시간표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여느 역과 달리 사람들은 시간에 연연하지 않는 듯 보인다. 아니 관심도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사람들은 물속을 걷듯 느릿느릿 주어진 공간에 누워있거나 혼자 아파한다. 침묵과 침묵, 고요 두려움과 슬픔의 공기가 무겁게 떠다니고 있을 뿐이다. 언뜻 보면 사람들은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순간순간 불안과 체념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시간 밖에서 그들은 서성이는 듯 보인다. 그러다 시간을 달리해 도착하는 기차는 예고 없이 왔다가 눈 깜짝 할 사이에 승객을 싣고 떠나갈 것이다. 그리고 살아있을 때 보여주던 그 어떤 흔적도 바람은 알려주지 않을 것이다.
어느 곳, 어느 역이든 역에 들어서면 마음이 설렜었다. 역사에 들어서면 마주치게 되는 사람들의 분주한 발걸음도 그렇고 플랫폼에 서면 눈가로 가득 들어오는 기차레일의 뻗어나간 직선이 그러했다. 그런데 이제 찾아오는 경계역은 예전에 느꼈던 설레임은 간데없고 답답함이 앞선다. 알 수 없던 마음보다 아쉬움과 안타까움 그리고 떠나가고 떠나오는 세상의 장소 중의 하나라는 생각이 더 든다. 생과 사의 경계에 서있다. 어쩌면 이곳은 인간에 대한, 인간 삶의 유한성에 대한 의문에 답하는 가장 현실적이고 적나라한 마지막 인간정거장은 아닐까.
 
그렇다면 경계 역에서 머물고 있는 이 사람들과 나,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나 역시 그곳을 향해 가는 중 아닌가. 영원히 머무는 것이 아닌 언젠가는 떠나야 하는, 떠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으로서의 인간의 삶과 그 생명, 인간은 필멸의 존재이다. 반드시 죽게 되어 있는 존재이고 또 그렇게 죽어가는 존재다. 지금 나의 발걸음이 어디를 향해 있든 그리고 어디로 향해 나가든 이 걸음은 죽음을 향해 다가가는 것이다. 그러니 여기 있음은 저기 없음과 다른 것이 아닌, 죽고 난 후에도 아무것도 그 이상이 될 수도 없을 것이다.
삶이 그렇듯 하루도 같은 날이 없고 같은 길이 아니기에 산자는 희망을 꿈꾸고 존재를 확인한다. 그러면서 인간은 늙어간다. 삶의 해는 져가고 길 위에서의 기억은 점차 희미해져 간다. 그러면서 이런저런 생각들, 상념, 가슴 깊은 곳의 회한이 밀려온다. 지금 어느 별, 어느 역에 머물고 있는가. 어떻게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이런 물음이 없다면, 정거장에서 이런 탄식과 중얼거림이 없다면, 과연 살아있다 할 수 있을까.
오늘도 서성이다 집으로 돌아간다. 왜 이 경계(境界)역을 서성이는가. 출발은 어머니에게 향한 걸음이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한 인간으로서 떠나가고 사라지고 무너지려는 것들을 기억하려는 안타까움과 길 위에서의 이 삶의 지상적 기쁨을 그르치지 않기 위한 몸부림으로 서성이는 것이다. 바람이 분다. 낙엽들이 흩날리며 어디론가 날아간다. 문득, 삶의 그 허다한 간이역에서 만났던 사람들이 스치듯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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