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꽃, 그리움이었네

2018.09.16 19:24:40

홍성란

수필가

지난여름이 아무리 뜨거웠다 해도 생(生)의 저녁만큼 뜨거울까. 분꽃이 피었다. 생각지 못한 일이다. 올 봄, 화분갈이 하느라 화단에 있는 흙을 담는 과정에서 떨어졌던 꽃씨가 딸려 온 모양이다. 꽃씨는 그렇게 군자란 옆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씨를 뿌리지 않았으니 싹이 올라와도 그저 풀인 줄 생각했다. 그러다 보잘 것 없던 풀포기가 삐죽삐죽 잎을 피우고서야 분꽃이란 걸 알 게 되었다.

그저 바람에 날아온 줄 건성으로 보았던 한 생명. 단단한 무릎처럼 다부져 보이는 밑가지가 여러 갈래 갈라지면서 마주 보는 잎들을 피워내더니 종내는 첫 꽃을 피웠다. 첫 꽃이 피던 날 내 입에선 여지없이 탄성이 흘러 나왔다. 그것은 새 생명에 대한 감탄이며 향기에 대한 찬사였다. 분꽃의 별명이 four o 'clock 인 것처럼 신기하게도 시계는 4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활짝 핀 진분홍 꽃받침은 플라맹코를 추는 집시여인의 치마 결을 닮았고 밖으로 나온 수술 5개는 여인의 긴속눈썹을 연상케 한다. 더구나 그녀는 은은하면서 고혹적인 향기를 지니고 있다. 나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향기에 취해 한참을 떠나지 못한다. 그런데 향기에서 문득 기억 저편의 잊혔던 한 얼굴이 떠올랐다.

정희언니! 얼마 만에 불러보는 이름인가. 세월이 참 많이도 흘렀다. 유년시절이니까 7~8살 쯤 이었을 게다. 대농(大農)인 외가댁엔 농사와 집안일을 도와주는 분들이 계셨다. 부부로 오는 분들도 있고 남자 혹은 여자 홀로 일하기도 했었던 것 같다. 그 분들 중 지금도 많이 보고 싶은 또 하나의 이름이 있다. 구수한 경상도 말씨의 '호이 아저씨'다. 부리부리한 눈에 입이 무겁고 성실해서 외할머니께서 막내아들처럼 다독였던 분인데 인정이 많았다.

그런 호이아저씨에게 사랑이 찾아왔다. 그 사랑이 정희언니였다. 시골 처녀치곤 피부가 유난히 보얗고 초승달 같은 눈썹에 참하고 얌전했다. 자식처럼 여겼던 외할머니는 집을 마련해서 분가를 시켰고 두 내외는 무척이나 행복해했다. 그런데 신의 질투였을까. 신혼의 기쁨이 오래 가지 못했던 것 같다. 2년 쯤 되는 봄, 뜻밖에 엄청난 사단이 났다. 어느 날부터인가 호이 아저씨가 보이지 않았다. 며칠 후 호이아저씨가 도망갔다는 소문이 돌았다. 화투에 손을 댔다는 것이다. 한 달, 1년이 지나도 아저씨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니 아무도 그의 소식을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언니는 빚으로 인한 괴로움에도 묵묵히 남편을 기다렸다. 그런 언니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 안쓰럽고 애잔한 비애를 느끼게 했다. 내가 분꽃향기에서 그녀를 떠 올린 것도 아마 이런 기다림과 저녁 무렵 그녀의 모습에서 연유한 것이리라. 지금도 비련처럼 풍경처럼 아련하게 남아 있는 분꽃을 닮은 그녀. 그녀의 나직한 음성 기다림의 눈빛이 흔적처럼 머물던 우물가. 해질 무렵 분꽃이 피면 정희언니는 이남박을 들고 우물가로 가서 쌀을 씻었다. 그리고 간절한 눈빛으로 분꽃을 바라보았다. 그때 그녀의 긴 속눈썹에 맺힌 물방울은 왜 그리 슬퍼보였던지. 추억은 그 시간, 그 사람의 흔적과 냄새를 기억 속에서 꺼내 그리움으로 살아나게 하나 보다.

지금 그 그리움이 저녁을 밝히고 있다. 분꽃은 내게 한 생(生)의 저녁을 이해시키는 듯 다가온다. 그것은 내가 이 세상에 오기 전의 이 세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또 한편으론 이 세상에 올 때부터 가지고 왔다고 생각되는 그 비애보다도 화사이 피어서 꽃 속을 걸어 나오는 이를 만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볼 수 없어 더 생각이 나는. 해질 무렵 이남박을 들고 우물가로 가던 그 여인. 심은바 없어도 꽃이 피어났듯 그리움이 내 일상을 툭 치고 밀려온 것이다. 이 저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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