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이가 연주하는 교향곡

2023.03.19 15:30:42

이정희

수필가

냉이를 다듬는다. 며칠 전부터 꽃샘추위를 했다. 추워서 그런지 떡잎이 지고 칙칙하다. 겨우내 떨었을 거다. 시들었다 해도 끓는 물에 데치면 거짓말처럼 파랗게 살아났다. 겨울을 비집고 나온 뿌리심이다. 사흘 전에 캤는데도 여전히 싱싱했지 않은가. 손이 곱을 정도의 추위가 한몫을 했던 것일까.

냉이를 캐던 날은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렸다. 잔설이 희끗희끗한 응달에서도 기를 쓰고 올라왔었지. 한 뿌리를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춥고 힘든 체 엄살을 떨라니까. 그래야 꽃샘바람의 직성이 풀릴 텐데 아무렇지도 않은 듯 굴면 더 심술을 부리지 않겠어?" 라고 했지만 "그래 가지고는 봄을 만들 수 없어. 달걀로 바위 치는 거지만 그런 배짱이 아니면 겨울을 깨부수지 못해"라고 하는 다부진 소리.

꽃샘바람도 그 말을 들었다면 맥이 탁 풀렸으리. 꽃이 피고 잎 트는 꼴은 절대 못 본다고 갖은 수작을 부렸다. 봄인데도 추웠다. 봄이 올까 싶었지만 냉이를 볼 때는 안심이 되었다. 장정 열이서 도둑 하나를 막지 못하듯 꽃샘바람 군단이 봄을 이긴 경우는 한 번도 없다. 운명도 결사적이라야 씨아리가 먹힌다. 독을 이기는 것은 독 외에 없다. 운명에 맞서는 건 여간내기라고 할 뚝심이다. 풀조차도 모질게 산다. 인생도 엄살이나 떨고 투정을 부리기 위해 살 수는 없다.

냉이를 캘 때 크다 싶으면 대부분 돌밭이나 딱딱한 자리에 뿌리박았다. 호미가 들어갈 수 없이 딱딱한데도 바짝 파고들어 늘씬하니 곧은 뿌리가 되었다. 해동이 되면서 봄비가 자주 내렸는데도 딸려 오지 않는 걸 보면 대단한 뿌리심이다. 양지쪽 비옥한 데서 다박다박 얽혀 자란 냉이는 잎사귀 치레다. 거름이 좋다고 잘 크는 게 아니듯 나쁜 환경도 괜찮을 수 있다. 기왕이면 원만하고 순조로운 게 좋겠지만 악조건도 비관할 건 아니다.

다음으로 튼튼한 냉이는 응달에서 뿌리박았다. 겨울에는 양달도 눈에 덮이는데 항차 응달은 얼음골이라고 할 만치 춥다. 봄이 되어도 잘 녹지 않는 데서 오직 뿌리심만 믿고 버텼다. 얼어빠진 잎은 시들어서 볼품없건만 당겨도 잘 뽑히지 않으니 놀랍다. 봄나물은 많으나 남보다 일찍 나오면서 특별순위에 놓고 예찬하는 것이다.

자세히 보면 또 친구도 없이 홀로 자랐다. 드문드문 떨어져 있다 보니 잔뿌리 하나 없는 곧은 뿌리가 여타 나물보다 곱절은 커 보였다. 추운 날씨와 거친 땅에서 혼자 그렇게 강해졌으리. 쓸쓸한 바람모지였으나 그로써 더 맛있게 큰 거라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답은 나왔다.

겨울의 빗장을 뽑을 수 있는 것은 독종이라고 할 봄의 뿌리고 그래서 매장된 초록이 살아났다. 겨울을 나지 않으면 그런 맛이 나올 수가 없고 그래서 이른 봄 나물이 보약만치나 좋다고 하는 것이다. 제아무리 강해도 얼었던 땅을 뚫고 머리를 쳐드는 봄나물의 뿌리심에는 미치기 어렵고 그게 1년의 초록을 길어 올리는 마중물이다.

나도 그렇게 자라리라고 생각했다. 따스하고 부드러운 건 양념과 고명으로만 생각할 뿐 삶의 목록에는 끼워 넣고 싶지 않다. 겨울을 나야 봄이 되는 것도 냉기를 무릅쓰고 푸르러진 속내를 뜻한다. 추워도 꿋꿋이 견딜 때 탐스러운 냉이로 자라듯 어려움도 당연한 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겠다.

이제 콩가루에 묻혀 끓여내면 봄의 지기가 가득찰 것이다. 삶아서 무쳐도 탑탑한 맛이 나는데, 어떻게 요리하든 맛이 좋고 특유의 내음이 돋보이는 것 또한, 응달인데다가 채 녹지 않은 땅에서 캐 온 까닭이리라. 따스해지면 잎 치레라서 다듬을 것도 없겠지만 추울 때 캐는 냉이야말로 오리지널 진짜배기다.

겨울의 혹한도 모자라 꽃샘바람에 시달린다. 설상가상이 아닌 금상첨화 격으로 더 좋게 될 증좌다. 돌밭이고 응달이라 더 앙탈을 부렸다. 봄의 교향곡을 연주하는 주자로 손색이 없다. 봄은 겨울을 견딘 자의 몫이며 그 꽃눈을 싸안는 것은 겨울이라는 걸 냉이를 캘 때마다 교훈처럼 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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