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홀과 화이트홀 접경지에서

2020.07.05 14:59:05

이정희

수필가

해가 지고 어둠이 몰려온다. 조금씩 어두워지는 것을 보고 밤은 어둠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라고 생각했다. 암흑의 페이지만 나오던 밤은 묽어지고 새벽은 이어서 어둠의 횃대에서 내려오겠지. 시간이 갈수록 밝아지고 아침의 향연을 시작하면서 밝음을 토해내는 새벽의 화이트홀이다.

블랙홀은 우주의 모든 것을 빨아들인다. 화이트홀은 반대로 토해내는 공간이다. 빨아들인 만큼 토해내는 공간이 있다면 하루 역시 어둠을 흡수하는 블랙홀과 밝음을 토해내는 화이트홀의 반복이 아닐까. 눈 감으면 첫 새벽 어둠이 묽어질 때마다 뒷걸음치는 어둠과 지난 밤 내내 암흑을 흡수하던 시간의 블랙홀이 밤의 침묵으로 사라진다.

화이트홀은 결국 밝음을 토해낸다. 어둠을 흡수하는 시간은 밤의 블랙홀이고 그 둘을 가로지르는 웜홀도 있다. 수박의 표면에 있는 벌레가 반대편으로 갈 경우 한가운데 구멍을 뚫어 가로지르면 훨씬 빠르다는 원리다. 두 개의 공간을 통과하는 지름길이었으나 벌레로서는 오히려 힘들다. 설혹 뚫고 나갈지언정 온통 물에 젖는다. 그럴 바에는 돌아가는 게 낫다고 해서 벌레구멍이라고도 하는 웜홀, 참으로 익살스럽다.

밤도 생각하면 비슷한 원리다. 아침의 궤도를 향해 나아갈 때도 땅 속을 가로질러 반대편으로 나올 수 있다. 밤새 돌아가는 것보다 빠르겠지만 벌레가 다니는 수박의 내부도 어려울진대 하물며 깊은 땅 속이다. 여러 가지가 번거롭고 그러느니 밤새 돌아 아침의 능선에 발을 내딛는 게 합리적이다.

블랙홀과 화이트홀의 반대적 개념을 접목하면 세상 모든 어려움도 수월하게 정리된다. 블랙홀에서 빨아들인 게 화이트홀에서 뿜어져 나오듯 소망의 아침 해도 밤새 흡수한 뒤 토해낸 밝음이다. 깜깜한 터널을 지나온 첫새벽 태양처럼. 역경의 터널에서 뿜어져 나온 행복처럼……

힘들어도 정석으로 가는 것이다. 어려움을 수용한 뒤 뿜어져 나오는 행복의 개념은 어렵게 이루어질 때가 더 보람을 느끼게 된다. 쉽게 가는 길은 오히려 힘들 수 있다. 살 동안의 시련을 수박이라고 볼 때 내부를 뚫고 가면 수월하겠지만 반대편 또한 시련의 한 자락이다.

역경은 다들 꺼리지만 걸림돌은 계속 등장한다는 의미다. 딱 한 번이면 몰라도 일일이 피할 수는 없고 극복하는 게 합리적이다. 제법 까다로운 물리학 이론이기는 해도 그 개념을 삶에 접목해 보는 느낌이 묘하다.

웜홀의 지름길은 노력해 볼 만치 해 본 다음 역부족일 때나 생각할 일이다. 가령 뭔가 속히 해결된다 싶을 때는 그 전에 이미 힘든 과정을 답습한 결과다. 평소 빠른 길을 선호할 경우 의외로 더디 진행되는 것보다 훨씬 창조적이다. 웜홀이 블랙홀과 화이트홀의 간격을 단축시킬지언정 빨리 가는 게 목적이라면 무리가 따른다.

중요한 것은 블랙홀을 수용한 뒤 뿜어져 나오는 행복의 본체다. 사는 건 어려움의 연속이고 열에 아홉을 극복한 뒤 한번쯤 토해내는 소망이 진정한 행복이다. 밝은 이미지였던 화이트홀의 개념은 참을 만치 참고 나면 뭔가는 주어진다는 거다. 이론적인 배경과 상관없이 필사의 노력에도 역부족일 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게 되는 결과를 추구해야 되지 않을까.

우리 소망의 골짜기는 예쁜 화원과 잔디밭이 아니다. 무성한 덤불을 헤치고 들어간 곳에 핀 몇 안 되는 꽃떨기가 전부다. 시련의 골짜기 블랙홀에서도 견디는 것은 이따금 빛나는 화이트홀 때문이다. 이도 저도 여의치 않으면 어려움과 시련을 관통하게 될 웜홀이 있다. 블랙홀과 화이트홀의 연결점이라기보다는 막바지에 내밀 수 있는 비장의 카드다. 삶의 방정식을 또 한 번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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