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수지의 봄

2020.07.19 14:39:37

이정희

수필가

새싹이다. 염소 뿔도 녹인다는 복중 꼬팽이에 저수지는 난데없는 초록을 틔웠다. 겨울 다음 봄이 아니고 한여름 난데없는 연둣빛 새싹이다. 가뭄으로 시꺼먼 속내를 드러내던 바닥이 초원같이 잔디밭같이 푸르다. 운동장보다 넓은 저수지 둔덕에 봄도 아닌데 파릇파릇, 참으로 신비스럽다.

처음 물 빠진 자리는 너울너울했고 그 다음 올라간 것은 초록색 융단이다. 갓 볶아낸 은행 색인가 하면 녹두 빛깔 띠처럼 보였다. 한여름인데 봄이 별도로 자랐다. 가장자리부터 나오기 때문에 중심으로 갈수록 엷어진다. 그런 중에도 훨씬 야들한 느낌이라 새싹 돋는 봄으로 이름 짓고 싶었다.

한여름이 되면 물이 마르는 것은 흔한 일이다. 하지만 그 바닥에서 풀이 나오고 갯버들까지 자란다. 한 뼘 가량 돋아날 즈음에는 잠겨 있던 물풀까지 보인다. 가뭄 끝에 드러난 바닥으로 흙 속의 씨앗이 싹을 틔우면서 푸른 양탄자를 펼친 것도 좋고 물이 잔뜩 잠겨서 수면을 중심으로 풍경이 두 개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오래 전 그림같이 예쁜 집에서 살던 때가 있었다. 진초록 지붕을 얹은 기와집을 사람들은 별장 같다고 했다. 국화를 키워서 놓아두면 지나가는 사람들까지 와서 들여다보곤 했다. 그걸 보고는 집이 예쁘니까 꽃까지 예쁘다는 시샘 아닌 시샘을 했다.

까닭은 있었다. 먼저 살던 주인이 새 집을 짓고 나가면서 몇 해 동안 비워둔 탓에 폐허가 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낡은 지붕은 곰이 피고 덤불로 뒤덮였다. 이후로도 쓰레기며 오물은 거기 쌓아두었는지 곳곳에 거름치레였다. 호랑이가 새끼를 쳐도 될 만큼 올라온 풀은 서리맞아 죽고 이듬해 다시 또 자란 풀이 깊은 산 낙엽처럼 켜켜로 쌓이면서 부엽토가 되었을 테지.

이웃사람들조차 코를 막고 다녔을 거다. 그러나 퀴퀴하게 냄새나고 더러운 그것이 오랜 날 발효되면서 가장 좋은 거름이 되었다. 내가 본 무더위 속의 푸른 봄 역시 시꺼먼 개흙에서 싹을 틔운 것 같았으므로.

안팎이 따로 없는 뫼비우스 띠를 보는 것 같다. 쪽가위로 종이를 길게 오렸다. 그 다음 종이를 오려서 양쪽 끝을 이어 붙이자 테이프가 되었다. 보통 그런 식인데 한 번 꼬아서 붙인 뫼비우스 띠는 안팎이 분리되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진다. 윗부분부터 종이를 따라 한 바퀴 돌아가니 반대쪽 면에 닿았다. 그렇게 다시 두 바퀴 돌다 보면 처음 시작 부분에 닿는다. 안팎이 그냥 평면으로 이어진 셈이다.

불행으로 시작된 삶도 행복으로 끝날 수 있다. 행복한 삶도 언제 불행의 늪에 빠질지 모른다. 저수지도 처음에는 거무스름한 바닥에 놀라고 파릇한 싹에 놀라고 끝으로 홍수에 잠기면서 양쪽으로 펼쳐진 풍경에 놀라듯 희비애락에서 발원되는 모습도 다양했다.

안팎을 구분하기 어렵고 끝없이 반복되는 과정은 쇠털같이 많은 인생을 떠오르게 한다. 뫼비우스 띠를 보면 기하학과 물리학이 접목된 것 같아서 참 어려워도 삶에 대입할 때의 의미는 자못 새롭다. 행복인 줄 알고 가다 보면 불행으로 이어질 때도 있지만 불행인 줄 의기소침해서 가던 길이 뜻밖에 행복의 입구가 되기도 한다면 고무적일 수밖에.

해거름, 기슭을 끼고 돌아가 본다. 군데군데 소금쟁이가 눈에 띈다. 쪼아대면 물무늬가 번졌고 일제히 헤집으면 또박또박 퍼지던 물살이 회오리가 된다. 그 위에 동심원이 곁들이듯 삶도 축축이 뒤바뀌는 새옹지마다.

가뭄이 들 때마다 거북이 등 같은 바닥은 섬뜩했으나 그래야 가뭄 끝의 싹이 자란다. 바닥이 나지 않았으면 두 번의 봄이 가능했을까. 동심원 또는 회오리만 있지 않은 것처럼 기쁨은 슬픔이 되고 아픔 또한 즐거움이 된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듯이 털어서라도 살아볼 만한 이유를 찾는 게 기쁘고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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