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통장

2022.08.28 14:30:50

이정희

수필가

카드를 쓰다 보면 잔액이 없어 당황할 때가 있다. 드림흥정하듯이 나누어서 지불하는 것도 번거롭고 그래 잘 쓰지 않는다. 미리 미리 넣어두면 간단한데 아무리 많아도 잔액에 신경 쓰기는 마찬가지일 테니까.

어느 날 내게 추억 통장이 하나 생겼다. 비밀번호도 필요 없고 아무 때나 출금이 가능하다. 찾아 써도 늘어나고 새로 넣으면 더더욱 늘어난다. 어디 은행에서 발급받은 게 아니라서 잃어버릴 염려도 없거니와 다른 사람이 찾아 쓴들 걱정할 게 아니다. 뒤늦게 알고 나면 자기에게도 있음을 깨닫게 될 테니 오히려 좋은 일이다. 내가 잃어버린 통장으로 누군가는 잃어버린 행복을 찾게 된다. 강물도 쓰면 준다지만 그럴 염려가 없는 전천후 통장.

특별히 밤에도 꺼낼 수 있어서 편리하다. 일반 통장 같으면 컴퓨터를 여는 등 번거롭지만 추억통장은 생각하는 동시에 인출이 된다. 잔고에 신경을 쓰거나 힘들게 벌어서 입금할 필요가 없다. 축복이다. 잠자리에 들기 전이나 여행을 다닐 때는 훨씬 많이 꺼내게 되고 동영상이 나오면서 만리성을 쌓기도 한다. 넝쿨째 들어오는 행복은 흔하지 않으나 추억 통장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축축이 꺼내 볼 때마다 잠깐 행복에 젖는다. 가끔 살구 꽃 피는 언덕에서 예쁜 시집을 꺼내 읽는 단발머리 소녀가 스쳐갔다. 노을 지는 해거름 강변을 끼고 돌 때는 금방 시인이 된 것 같은 환상에 빠지기도 했다. 통통했던 그 때의 추억은 간 곳이 없지만 수시로 꺼낼 수 있는 통장을 생각하면 참 다행이다. 암만 써도 괜찮은 화수분 통장을 가진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싶어진 거다.

잠이 깨면 창가에서 우짖는 산새를 동영상에 담는다. 깊은 밤 수많은 별이 반짝이는 정경을 상상하다 보면 산책 나온 달이 보였다. 눈으로 완상하는 동시에 풍경이 낱낱 찍힌다. 사진작가들이 필름에 담아 저장하듯 나 역시 눈동자에 찍힌 영상을 분류하고 저장한다. 돈이 많아도 별 뜨는 하늘 밭뙈기조차 사지는 못할 테니 마음만 먹으면 구만리장천을 통째로 명의 이전할 수 있는 내가 훨씬 여유롭다.

구름이 떠가고 노을 지는 하늘은 비가 오면 질척이기나 하는 지상의 땅과는 다르다. 온갖 초목이 자라기는 해도 송곳 하나 꽃을 땅이 없다는 푸념이 나올 때는 하늘에 눈을 돌리라는 거다. 바람 불고 비가 불어도 곧 이어 펼쳐질 푸른 하늘의 전주곡인 것처럼 힘들고 어려운 일도 훗날 아름다운 추억 통장의 영상으로 남을 테니까.

첨부파일에는 또 풍경이 담긴다. 아름다운 풍경과 소중한 기억이 차곡차곡 쌓였었지. 돈으로 얻는 행복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으나 추억 통장의 행복은 화수분이다. 싱그러운 바람과 따사한 햇볕과 반짝이는 별은 천금으로도 살 수 없지만 돈 한 푼 없이도 수중에 넣을 수 있다. 바쁘고 경황이 없을 때도 추억을 생각할 동안 프리미엄으로 붙는 것들이다. 지금부터 저장되는 것은 또 훗날 꺼내볼 수 있다. 더 예쁜 생각을 갖고 살아야겠다.

가끔 통장의 비밀을 알려 준 사람이 떠오른다. 짜증 부릴 상황에서도 "그럴 수 있으니까." 라며 웃어넘기는 사람에게서 통장의 내력을 들은 것이다. 나도 모르게 무릎을 쳤다. 그래서 늘 그렇게 밝고 명랑했었나· 힘들 때는 얼결에 찜부럭대도 우연히 전수받은 통장 때문에 늘 행복하다. 세상의 그 많은 통장에는 입력되지도 않을 소중한 추억이 들었으니까.

지금 그 통장은 재산 목록 1호가 되었다. 깊이 간수할 필요도 없고 꺼내도 줄지 않으니 돈 많은 사람의 통장도 일없다. 숫자만 잔뜩 나열된 통장보다야 주저리주저리 꿈이 열리고 대추나무에 연줄 걸리듯 추억이 얽혀 있는 통장이 훨씬 이채롭다. 돈이 없다 보니 돈 많은 사람으로서는 꿈도 못 꿀 특별한 통장을 수중에 넣었다. 어렵고 힘들어도 나만의 영역을 가꾼다면 무한 행복해질 것 같다. 누구나 가질 수 있지만 아무나 가꿀 수 없는 추억의 텃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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