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꽃으로 보는 삶

2020.06.07 16:07:06

이정희

수필가

무심코 낡은 책을 넘겼다. 툭하고 떨어지는 애기똥풀 이파리. 웃음에도 빛깔이 있는 듯 노랗게 번진 미소가 묻어난다. 부서지지 않게 테이프로 붙이고 매발톱 붉은 꽃잎도 백표지에 꼼꼼 감아 두었다. 바싹 마른 채로도 고운 들꽃은 기분까지 싸했다.

아침부터 소쩍새가 울었지. 소낙비 그친 개울에 가 보니 애기똥풀이 보석처럼 하늘거린다. 노란 꽃잎 때문에 다짜고짜 애기똥풀이라니 별나게 직설적이다. 줄기를 꺾었을 때 즙은 천연 그 빛깔이었지만.

어떤 새들은 자기 이름 붙은 나무에서 운다더니 꽃은 제 이름 그대로 핀다. 생김보다는 노랗게 물든 꽃잎 때문이지만 개울가에 지천인 꽃을 보면서 갓난아기들 똥을 연상할 때만큼은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했겠지.

애기는 또 제가 눈 똥이 어떤 꽃 이름으로 된 것을, 가령 기저귀 갈아주는 어머니가 냇가의 노란 꽃을 볼 때마다 웃음짓는 걸 알았다면 꽃처럼 아기자기한 기분이었겠다. 좀 더 자라 얼마 후 개울에서 우연히 보고는 그 이름이 된 배경을 생각할 수도 있겠다. 예쁘고 소담하지는 않아도 유달리 샛노란 빛깔은 애기가 눈 황금빛 똥 그대로였으니까.

둔덕의 매발톱꽃도 생김 그대로 붙은 이름이다. 애기똥풀이 샛노란 빛깔 때문이라면 그 꽃은 매발톱 모양이다. 애기똥풀만 해도 똥이라는 말이 천박하기는커녕 무척이나 해학적이듯 매발톱이라고 약간은 난폭한 꽃 이름도 들판의 꽃 이름에 들어가면서 부드럽고 익살스런 이미지로 바뀌었다.

농번기에는 대부분 집이 텅 비고 철부지 병아리가 뜰을 서성일 때마다 송골매 녀석들이 후딱 채가던 풍경이 그려진다. 대문에 들어서던 농부가 어마지두 놀랍고 괘씸한 생각에 저 놈 저 놈 하고 노려보던 중 그 발톱이 들에 핀 어떤 꽃망울과 흡사한 걸 알았겠지. 꼬리가 길어지면서 잡힌다고 날카로운 발톱으로 움켜쥐고 날아갈 때마다 그 이름을 상상했겠지만 한때는 귀여운 보라매였다. 명색은 매라고 불렀어도 아직은 앳된 새였을 테니 감히 병아리를 채가지는 못했다.

결국 다 자란 녀석의 짓거리라고 단정하면서도 저희들 애기처럼 귀여운 때가 있었다고 하면서 종종 눈감아 주었을 건데. 빛깔도 예쁘게 노란 똥 누던 아기가 방글방글 미소는 간 데 없이 시꺼멓게 똥 누는 어른이 되듯 솜털 보송한 새끼 매 역시 자란 뒤에는 온 동네 병아리를 노릴 수 있다. 아무리 그래도 살면서 찌드는 자기들과 다르지 않다고 우정 봐 주기도 했겠다.

한낱 들꽃이래도 사연 없는 꽃은 드물다. 희귀한 이름 붙인 사람 사람들의 가지가지 속내 그대로다. 밭둑에 핀 꽃 애기똥풀은 누구나 거쳐 왔을 어린 시절의 대명사격 꽃이다. 그 빛깔 그대로 누면 탈이 없는데 시퍼렇게 누기라도 하면 탈이 생긴 거라고 긴장했던 기억은 있었을 테니.

매발톱 꽃을 보면 또 갓 태어날 때부터 키운 병아리 생각에 속상했을 거다. 아침저녁 때맞춰 모이를 주고 공들여 키웠는데 제 새끼 먹이고자 채갔을 거라면서 그렇게 이름 지었다면 똑같은 자식 사랑이다. 그래 병아리를 채가는 짓거리도 덜 괘씸하고 늘 보는 꽃 이름에 붙여주기까지 했다. 자식 사랑이야 피차 다를 게 있으랴 웃음 섞어 바라보기도 하면서.

엉뚱한 비약이었으나 밭둑에 핀 예쁘장한 들꽃마다 어쩜 그렇게 가지각색 이름으로 태어난 것일까. 자랑할 것도 내세울 것도 없는 서민들이지만 그 이름을 상상할 때만큼은 순수했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 힘든 날을 잊게 되었다면 절절한 사연 담은 꽃이다.

그들은 또 그렇다 치지만 나 역시 이름도 희귀한 꽃을 핑계로 오래 전에 죽고 없는 사람들 속내를 시시콜콜 들추고 있다. 듣기만 해도 예스러운 이름 떠들어보고 배경을 추적할 동안 더위도 잠깐 잊었다. 이맘때면 약속이나 한 듯 비슷하게 피는 꽃, 희귀한 이름을 전수받은 내력이 아침나절 퍼붓던 해류뭄해리처럼 시원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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