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국힘당 대통령 후보는 "전두환 대통령이 잘못한 부분이 있지만, 군사 쿠데타와 5·18만 빼면 정치는 잘했다고 말하는 분들이 많다"고 했다. 문제가 되자 "개 사과"를 하여 갈등을 확대하였다. 마지막 토론에선 "식용강아지와 애완견은 구분해야 한다"는 발언으로 모두를 놀라게 했지만 최종 국힘당 후보 1인이 되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잔인함으로 권력을 잡은 군주는 권력을 지탱하기 위해 계속 잔인하게 일을 할 수밖에 없다. 조금씩 고맙게 베풀어 주는 혜택을 준다 해도 권력을 지탱하기 위해 꾸미는 꾀나 방법이지 지배를 당하는 사람에 대한 이익을 위한 것은 아니라고 밝혔다.
잔인함을 바탕으로 권력을 잡은 군주는 전두환 아니던가. 강력한 정치적 힘을 손에 넣기 위해서는 강력한 독재정치가 필요하고, 때에 따라서는 힘을 이용하거나 행사하는 폭력도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대량 학살을 자행한 사악한 인물일 뿐이다.
공자는 인(仁)에 의한 덕치를 맹자는 왕도정치에서 덕으로 국가를 다스려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전두환은 이와는 거리가 먼 추악한 탐욕이 가득한 인물이다. 이러한 사람을 옹호하는 발언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망언임에 분명하다.
박아놓은 쇠말뚝을 뺄 수가 없다/ 간간이 고삐를 당겨서 둥글게 원을 그려보지만/ 최대한 볼 수 있는 거리는 한정된 시야뿐이다/ 찰랑이는 저수지 너머 푸른 들판이 보여도/ 겁 많은 눈동자 속에는 아른대는 그리움만 가득하다/ 그 옛날의 등짐이 무거워 털썩 주저앉으면/ 우물대는 되새김질,/ 푸른 풀 같은 꿈을 씹으며/ 산 너머 구름발에 걸린 먼 옛날을 기대어본다/ 그러면 불현듯 새어나오는 울음소리/ 그것은 얼마나 그리운 자유인가/ 쇠말뚝 때문에 만날 수 없는 소의 앙탈에/ 고삐로 그린 작은 영역에는/ 허리춤의 풀들이 잘게 꺾여지고/ 짓뭉개진 황토 흙이 전쟁터 같은 길을 낸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땅의 심장에 꽂힌 쇠말뚝을 뽑을 수 없어/ 황소는 편하게 엎드려 되새김질만 한다
- 유진택, 「쇠말뚝」 전문
생동하는 존재가 지니고 있는 유일한 도구는 '자유'이다. 자유에 의한 근원존재는 단순한 존재가 아니라 자유로운 의지를 가지고 있는 존재로 "간간이 고삐를 당겨서 둥글게 원을 그려보"는 자유에 대한 갈망 그 자체를 가지고 있는 생명이다.
신과 자연과 인간은 "둥글게 원을 그"리는 의지를 통해 결속되어 있다. 자유로운 의지인 자연 의지와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가· 라는 물음에 "최대한 볼 수 있는 거리는 한정된 시야뿐이다" 라는 한 마디 뿐이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시인이 물어보는 자유는 본성에 따라 존재하는 자유로운 존재란 무엇인가· 이다. 자유로운 존재를 상실했을 때 우리는 "찰랑이는 저수지 너머 푸른 들판이 보여도/ 겁 많은 눈동자 속에는 아른대는 그리움만 가득하다/ 그 옛날의 등짐이 무거워 털썩 주저앉"고 마는 절망적인 상황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외부에서 가해오는 필연성에 결코 굴하지 않고 "황소는 편하게 엎드려 되새김질"만 하고 있다. 이는 존재가 자유롭다는 뜻이다. 외적 필연성인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땅의 심장에 꽂힌 쇠말뚝을 뽑을 수 없어"는 '은폐된 필연성'에 지나지 않는다.
황소가 내면이나 외면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도 규정되지 않는 편안함 속에서 "되새김질"하고 있듯, 5.18 상처를 안고 있는 광주는 진정한 자유인 내적 필연성과 통일을 찾아가고 있는 중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불쑥 내민 전두환 두둔 발언은 듣는 이 모두를 놀라게 했다. 단풍이 산하를 붉게 물들여 오는 가을이 되었다. 자유로운 존재란 어떤 것인가에 대한 물음을 안고 5월 푸르름을 기억하는 눈가에 잔잔한 눈물이 흐른다. 이젠 고요 속에 영혼을 뉘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