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밥 한번 먹읍시다

2021.11.11 16:36:58

김희식

시인

가끔 사는 것이 답답할 때가 많습니다. 이럴 때마다 집 뒤에 있는 산에 오릅니다. 오늘도 잠시 산책하듯 오르는 것이기에 별 준비 없이 길을 나섰습니다. 그러다 비를 만났습니다. 사람 사는 게 늘 느닷없는 일이 많지요. 당혹스럽긴 했지만 나름 기분이 좋았습니다. 아마도 마음 한편에 괜히 허전해 가을비를 맞으며 쓸쓸히 가을을 보내고 싶은 생각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후줄근히 바보 같은 내 모습이 그냥 좋았습니다. 그렇게 한동안 먼산바라기 하며 새앙 쥐가 되었습니다.

산 빛이 지난 세월만큼 흐리게 흔들립니다. 비에 젖은 낙엽이 우수수 떨어집니다. 발밑 흩어져 쌓인 이파리들이 투명한 기억되어 반짝입니다. 파편처럼 부서지는 부끄러움이 낙엽 위로 부스스 떨어집니다. 눈 감아 봅니다. 진한 회한이 아프게 다가옵니다. 그리움으로 물든 시간들이 기다림 되어 서성입니다. 살며 왜 그리 욕심을 내며 살았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이제 내 삶의 이파리들도 단풍 되어 떨어지는 것이 그리 서럽지 않습니다. 그렇게 많은 인연들을 산에 두고 내려왔습니다.

뜨겁게 샤워를 했습니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비도 맞았지만 아직 몸에 남은 욕망마저 씻기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씻겨나가는 추위와 기억들은 어느새 내 삶속에 다시 채워지곤 합니다. 늘 그랬습니다. 많은 이들을 떠나보내도 늘 그 자리에 다시 채워지며 머무르는 아픈 기억들이 있습니다. 아직 스스로의 욕망을 버리지 못하고 헤매는 나를 아프게 바라봅니다. 쥐면 쥘수록 빠져나가는 줄 알면서도 항상 한쪽 손에 모래를 잔뜩 쥐고 있었습니다. 참 불쌍한 존재입니다. 그게 한계인 것이지요.

한통의 전화가 왔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씩씩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우리 밥 먹자. 아!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았습니다. 그는 나와 40여 년을 동고동락하며 문화운동에 헌신해 온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이 험악하던 시절 젊음과 예술을 무기로 온몸을 던지며 같이 싸워온 동지였습니다. 그렇게 힘겹게 살다 병을 얻었습니다. 많이 아픈 그를 생각하면 미안하고 안쓰러울 때가 많습니다. 세월이 많이 흐르긴 했지만 가슴 속 간직한 여러 날들의 기억은 명치끝이 아리게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전화를 받은 이후 밀려드는 후회와 회한에 눈물이 났습니다.

밥을 함께 했습니다. 여럿이 회식자리나 뒤풀이 자리에서 함께한 기억은 많지만 이렇게 단 둘이서 먹는 밥은 처음인 것 같습니다. 서로 바라다보며 눈빛으로 이야기 했습니다. 서로의 안부와 마음으로 주고받는 이야기로 어떻게 시간이 지나는 줄 몰랐습니다. 무엇이 그리 바쁜지 소중한 사람들을 잊고 살았습니다. 이제야 후회와 반성을 하지만 어느새 훌쩍 세월이 흘렀습니다. 노을로 물든 인연되어 흐르는 기억의 강 저 너머에서 바람처럼 흔들립니다.

헤어짐이 아쉬워 바래다주고 오는 길에 늦가을비가 처연히 내 차창을 때립니다. 오늘 나는 내가 살아가는 삶의 이유가 무엇인지 자문해 봅니다. 살며 잊어야 할 것과 잊지말아야할 것들이 있습니다. 어쩌면 사람이 살아있다는 것은 잊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잊힌다는 것은 죽은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나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어느새 잊어버리고 잊어버려야 할 것들은 가슴 속 깊숙이 매달고 있었습니다. 나만 바라보았습니다. 참 어리석었습니다.

가을이 짙습니다. 꿈속 같은 한세상이 또 이렇게 저물어 갑니다. 나이 들며 멈추어 바라보는 세상이 아프기만 합니다. 그러나 내일은 또 햇살이 눈부시게 비추일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의 이치지요. 이제 마음 속 닫혀있던 창들을 반쯤은 열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세상에 대해 조금씩 열어가며 소중한 기억들을 간직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자, 우리 밥 한번 먹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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