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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19.06.02 15:26:00
  • 최종수정2019.06.02 15:26:00

이정희

수필가

해맑은 리듬이 귓전을 파고든다.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이 바람에 부딪친다. 꿈같은 이미지 속에서 더 이상 아름다울 수 없는 여운을 듣는다. 바람이 불어야만, 그것도 거센 바람일수록 아름답게 울리는 풍경의 근원에서 '라인 강의 종소리'를 생각했다.

라인 강은 서부 유럽에서 가장 큰 강이다. 강어귀로부터 990km까지 배가 다니고 있으며 운하로 이어져 발트해와 흑해로 흘러든다. 바로 이 강변의 城(성)에 바람이 불면 소리가 나게끔 장치를 한 사람이 있었는데 며칠이 지나도 이렇다 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한동안 잊고 지내다가 어느 날 뜻밖의 소리를 들었다.

아름답고 섬세한 음향이 강가에 울려퍼졌다. 며칠 전 설치해 둔 장치가 떠올랐으나 둔탁했던 소리를 생각하면 그럴 리가 없다고 보았다. 문제의 소리는 그 동안에도 점점 뚜렷해졌다. 달리 짐작할 만한 곳을 찾지 못한 그는 혹시나 싶어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깜짝 놀랐으니 소리의 진원지는 바로 그 城이었다.

엄청난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다. 천둥이 울고 벼락이 때리는 가운데 세상은 암흑에 뒤덮였다. 그리고는 문제의 아름다운 소리가 들렸다. 태풍 속에서 선율처럼 떠오르던 그 소리.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을 뚫고 가는 여운이 비바람에 조율되면서 꿈속의 선율을 자아낸다. 놀라움은 신기함으로 바뀌었다. 원하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고 팽개쳐 뒀었는데 그처럼 맑은 소리가 들렸으니 얼마나 놀랐을까.

바람이 불어야만 맑은 음향이 떠오르는 걸 보고도 처음에는 미심쩍은 나머지 반신반의했었다. 혼자서는 울 수가 없어 바람 불기만 기다리는 줄도 모르고. 바람 중에서도 오늘 같은 태풍을 기다려 소리를 내는 풍경의 연주방식을 비로소 보았겠지. 아무도 없는 古城고성에서 바람으로만 음향을 전한다. 혼자서 울지 못하는 자기고독의 표출이다. 혼자서는 울 수 없기에 하필이면 태풍의 여세를 받아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숙명이 절박하다.

그가 듣던 소리는 물론 지금 저 풍경 소리도 비바람을 뚫고 나온 울림이다. 바람을 타는 동안 메마른 금속음이 청아한 소리로 바뀐다. 스스로는 모질게 때릴 수 없는 약점 때문에 그런 자극이 필요했겠지만, 바람에 연주되는 악기와 그로써 조율되는 멜로디가 비바람 속에서 신비한 음으로 여울진다.

단순히 심심파적이었을 텐데 뜻밖의 섭리를 발견했다. 바람이 운명이라면 태풍은 곡절이다. 바람에 우는 악기처럼 우리도 태풍을 뚫고 가다가 파랗게 드러난 하늘을 보면서 삶의 진실을 노래한다. 거센 바람이라야 아름다운 소리가 나듯, 현명하고 원숙한 인간을 만드는 것으로 고난보다 더한 게 있을까. 믿음으로 인내할 때 고난은 축복으로 바뀐다. 쇠도 불에 단련되지 않으면 결코 강해질 수 없기에.

가끔 라인강의 풍경을 스케치한다. 백 번 천 번의 떨림과 울림으로 원초적인 음을 드러내는, 거기 종소리는 비바람이 만든 최고의 음향이었을 거다. 바람이 잔잔할 때는 둔탁한 쇳소리였던 것이 아름다운 소리로 바뀌는 것은 고난이 얼마나 우리를 인간적이게 하는지를 말해 준다. 가시에 찔리지 않고서야 어찌 장미꽃을 모으겠는가. 고난과 눈물은 결국 우리들 참된 값어치를 측정하는 시금석이었던 것. 보석과 즐거움은 그것을 이루어주지 못한다. 깜깜한 밤중에도 가장 어두운 것은 언제나 날이 밝기 직전이었다.

밤이 깊었다. 빗발은 약해지고 풍경 소리도 잦아든다. 아름다운 소리 때문에도 바람을 피할 수 없는 종소리의 배경이 풍경의 션율만치나 예쁘다. 지금도 누군가는 고난이 닥칠 때마다 참된 인간이 되는 과정임을 기억하리라. 우리의 마지막 기쁨과 위안은 힘들었던 과거의 추억과 다름 아니다. 고난은 우리를 강하게 만들지만 고난으로 강해지지 못한 사람은 삶의 찬가를 연주할 수 없다. 삶의 완성을 위해서도 시련은 필수적 과정이다. 고난이 없는 열매는 이 세상 어디고 없음을 라인강의 종소리에서 깨우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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