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할미 노랫소리는 어디서 듣지?"

2024.11.28 14:51:10

박영희

수필가

겨울로 접어드는 계절 언저리에 빛 잃은 산국화 향기가 애틋하다. 초록이 바랜 덤불 사이 작은 열매들은 마지막 햇살을 즐기고 있다. 나는 표표히 흐르는 은빛 물결 따라 가을걷이를 끝낸 들녘에 선다. 황량한 들판은 바람만 고요하다. 이맘때가 되면 고구마 이삭을 줍던 아낙들의 남루한 모습이 아스라이 지나간다. 농가에서 자란 유년기 탓일까, 하나둘 붉은 고추를 매달고 빈 밭에 외로이 서 있는 마른 고춧대 풍경은 마음을 더욱 쓸쓸하게 한다. 봄볕에 촉을 띄우고 여름내 푸르러 열매를 맺었을 텐데, 무서리에 퍼렇게 풀이 죽은 모습이 우리네 인생을 보는 것 같이 안쓰럽다.

갑자기 암 진단을 받고 우리 집에 들어와 투병 생활하던 딸이 어느 정도 치료가 끝나 제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제금아닌 제금을 내듯 이사를 앞두고 서로 홀로서기를 하기 위해 여념이 없다. 초등학교 2학년인 외손녀도 헤어질 결심을 하고는 "우리 할미 노랫소리는 어디서 듣지?" 한다. 한 구절 시처럼 들리는 아이의 말에 내가 평소에도 노래를 즐기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주마다 성가곡 연습하랴, 합창단에서 새로 배운 가곡 익히랴, 요사이 경연대회를 앞두고 가사를 외우느라 입가에 흥얼거린다. 그렇다고 내 삶이 날마다 찬가를 부를 만큼 아름답고 즐거움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슬프면 슬픈 대로 기쁘면 기쁜 대로 노래는 내 영혼의 고단함을 덜어내고 나를 세워가는 위안의 도구인 셈이다.

인생은 시간에 의해 음영과 굴곡들이 드리워진다고 한다. 나에게 지나간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의 시간은, 담즙처럼 쓰고 식초의 원액으로도 형언할 수 없는 신맛이었다. 별다른 어려움 없이 평범하던 우리에게 딸의 암 선고는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리였다. "엄마, 이제 나 어떡해"라며 울부짖던 딸의 젖은 눈물은 가슴을 도려내는 듯한 아픔이었다. 그날의 절망감을 "간이 녹는다는" 말로 대신해 본다. 죽음이라는 단어는 하루도 셀 수 없이 나를 찾아와 내 생각을 가로막으며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밀물처럼 두려움과 공포가 밀려올 때면 내 마음은 수도 없이 곤두박질을 쳤다. 고난의 끝은 어디쯤일까, 유쾌하기만 하던 어린 손녀들의 재롱도 그치고 풀이 죽은 모습은 차마 감내하기 어려운 현실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나는 딸의 어미이기에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어, 매일 밤 딸을 살려 달라는 기도로 밤을 지새웠다. 훗날 들으니 딸도 밤마다 사투를 벌이며 베갯잇을 적셨다고 한다. 네 번의 항암치료를 받으며 한 움큼씩 빠지던 머리카락을 무덤덤하게 삭발하고 오던 딸, 아무런 말도 못 한 채 속으로만 삭여야 했던 우리의 지나간 아픔은 그저 인생의 서막일 뿐이길….

어느덧 한 해가 저물어 간다. 그렇게도 쓴맛이던 절망의 시간도 조금씩 멀어져 간다. 소복이 자란 까만 머리는 얼마나 숭고한 생명의 신비인가. 모든 순간이 감사라는 딸의 고백에서 어쩌면 고난은 영혼의 안목을 키우는 통로였는지도 모른다. 학교로 돌아갈 꿈을 꾸며 복직을 기다리는 딸에게 좀 더 포근한 겨울을 선물하고 싶다. 아니 엄동설한이 온다 해도 나는 오롯이 딸을 위한 사랑의 화롯불을 피우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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