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관 풍경

2024.03.18 15:16:06

박영희

수필가

담장 너머 산수유 꽃망울이 나를 보고 노랗게 웃는다. 시샘하듯 그 곁에 매화나무도 연분홍 꽃잎을 하늘거린다. 어느새 새봄, 봄은 연달아 피어나는 꽃을 선사하며 내게로 왔다. 나이를 먹는 탓일까, 당연하게 오는 봄이 오늘따라 감사한 마음이다. 차곡차곡 봄의 향기를 가슴에 담으며 나도 누군가의 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복지관으로 향했다.

사회복지사에게 내가 봉사할 수 있는 일에 대해 상담을 드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도시락 배달 자리를 추천한다. 일주일에 한 번 독거노인의 가정을 방문해서 복지관에서 제공하는 반찬을 전달하는 일이다. 나는 수요일마다 네 가정을 찾아가 두 시간 남짓 노인들을 만나고 반찬 나누는 일을 시작했다. 나도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뿌듯함이 기쁨을 안겨준다. 일주일 분량의 반찬을 싣고 아침을 달려간다. 낯설던 김 할아버지 박 할머니 키가 큰 이 할머니 조 할머니…. 저마다 사연을 담고 노후를 외롭게 보내는 노인들에게 나는 딸이 되기도 하고 친구가 되려고 노력한다.

내가 처음 복지관을 찾은 건 작년이었다. 삼 십 년 넘게 일한 직장을 퇴직하고 황혼 육아의 반열에서 외손녀가 학교에 입학하자 시간에 여유가 생겼다.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걸까, 고민 끝에 복지관이란 곳을 찾게 되었다. 복지관 나이로 아직은 젊은 나이였지만 평생 공부라는데 용기를 내어 수필교실과 가곡교실에 두 강좌를 신청했다. 노인 인구가 늘어나면서 복지관의 강좌신청 경쟁도 치열했다. 운이 좋게 두 과목 모두 합격을 하여 뜻있는 공부를 할 수 있었다. 학우 간 나이 차가 있어도 서로 끈끈한 정이 들어서 새해에 만나자는 기약을 했다.

이번 학기도 경쟁이 더 치열하다는 소문이다. 실력으로 뽑는 것도 아니고 컴퓨터 추첨이라니 모두가 행운을 바란다. 올해는 한 과목을 늘려 기타를 배우기로 했다. 학창시절 내내 합창반이었던 나는 가곡을 좋아한다. 남의 노래를 듣는 것도 좋고 노래 부르는 것도 좋다. 햇살이 고운 오후, 홀로 건반을 두두리며 흥얼거리는 봄 노래는 얼마나 어설픈 찬가인가, 그래도 유유자적하며 노년의 삶이 익어간다. 노래는 마음이 슬플 때나 기쁠 때나 위로를 준다. 게다가 목청껏 고음을 냈을 때의 희열도 있다. 또 한 글쓰기는 나를 돌아보며 마음을 순화시키기도 한다. 기타 소리는 작은 울림이 있어 좋아한다. C G E D A코드 Dm 여고 시절 어깨너머로 오빠한테 배우다만 기타를 이번에 꼭 다시 배우고 싶다.

"박 선생! 당첨됐어요?" 지난해 가곡교실에서 함께 수업을 들으며 가깝게 지내는 열 살 연상의 정 선생님 전화다. 당신은 떨어지고 대기 13번이라며 울상이었다. 그러면서 꼭 추가 당첨의 행운을 기대한다며 전화를 끊는다.

마침내 개강 날이다. 이번 학기엔 93세의 어르신이 등록하셔서 모두를 놀라게 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더니 어르신을 두고 하는 말 같다. 피아노에 맞춰 발성 연습을 하고 "남촌"을 부르자 모두가 향수에 젖는다. 여기저기 불협화음에도 황혼의 노래는 행복을 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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