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죽 쑤는 남자

2023.01.25 16:52:03

박영희

수필가

산까치 부부가 나무 꼭대기에 집을 지으며 깍깍 행복의 노래를 부른다. 화답이라도 하는 듯 이름 모를 산새는 나뭇가지 사이를 날며 재잘댄다. 고요한 숲속에 새소리가 청아하게 들린다.

설을 맞아 친정 부모님이 잠들어 계신 선산으로 성묘를 왔다. 잘 단장된 가족묘지에는 얼굴도 모르는 선조들이 계시고 부모님과 먼저 간 형제까지 나의 혈연 들이 차례로 있다. 지나간 가족들의 평온한 숨결이 모여있는 듯하다. 나는 출가외인이라는 이유와 믿음직한 오라버니들 덕분에 명절 성묘는 제대로 참여하지 못했었다. 아들 다섯에 외동딸이던 나는 부모의 사랑은 독차지했으면서도 성묘에 게을렀으니 송구스럽고 죄스러운 마음이다. 묘비 앞에 서자 마음이 숙연하다. 조상들의 지나온 생애를 되짚어가며 참회의 기도를 올리고 평안을 빈다. 괜한 넋두리를 섞어가며 어머니 아버지를 불러본다. 이내 웃음 띤 얼굴로 나에게 다가오시어 다독여 주시는 기분이다. 어언 사십 년의 흘러간 세월, 어질고 자애롭던 부모님의 초상이 맴돌다 간다.

오대 독자 외아들이던 아버지는 마을 사람들에게 한글을 가르쳤던 가난한 농부셨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들을 풍자와 해학으로 이겨내시던 삶의 방식이 우리에게 긍정의 힘과 밝은 에너지를 심어주셨다. 농한기의 겨울이 오면 나를 데리고 마을 앞산에 올라 자주 시조를 읊으신다. 목청이 좋으시던 아버지의 시조 가락이 솔 내음 따라 산자락으로 구성지게 울려 퍼졌다. 애절하게 부르는 아버지의 노래는 구절구절 한을 토하듯 구슬프게 들렸다. 1910년 한일합방 시기에 태어났으니 아버지의 일생은 고난과 고통의 세월이었을 게다. 불운했던 시절을 보낸 아버지의 노래는 당신의 간절한 기도이며 희망이었으리라, 오늘따라 아버지의 노래가 그리워진다.

산에 눈이 왔었나 보다. 홑이불을 깔아 놓은 듯 동산이 하얗다. 어린 시절 겨울은 유난히 길고 눈이 많이 왔다. 밤새 눈이 내리는 날이면 새벽부터 길을 내시던 아버지의 싸리비 소리가 아직도 선명하다. 엄동설한에 마당을 가로질러 서 있던 빨랫줄은 을씨년스러웠다. 팔을 쭉 늘어뜨린 채 꽁꽁 얼어있는 아버지의 허름한 회색 내복은 덕장에 걸린 황태 풍경처럼 가여웠다. 광야 같던 인생길에 황량한 바람과 눈비를 견디며 오롯이 주어진 삶의 길을 걸어야만 했던 아버지. 가난한 농부였지만 따스하던 심성이 오늘의 우리로 키워주셨다. 비루하게 보이던 옛 단상들은 어느덧 혜안이 되어 나를 감싼다.

짧은 겨울 해는 산으로 둘러싸인 시골 마을에 일찍 어둠을 내렸다. 아버지는 뜨물에 등겨와 볏짚과 콩깍지를 섞어 큰 가마솥에 소여물을 안치신다. 이윽고 아궁이 앞에서 긴 시간 풍구질을 하셨다. 어린 나는 할아버지 같은 아버지 곁에 앉아 불을 쬔다. 아궁이 속에 왕겨를 한 줌씩 흩뿌릴 때마다 아버지의 운명처럼 불은 사그라들다 다시 활활 타올랐다. 헉헉거리며 돌아가던 낡은 풍구 소리는 아버지의 고단한 숨소리처럼 들렸다. 켜켜이 까만 재를 아궁이 앞으로 끌어모아 고구마를 구워주시던 자상한 손길에서 우리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배웠는지도 모른다. 쇠죽을 끓일 때마다 둥근 솥 둘레로 시루 번처럼 널 부러 있던 젖은 양말들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땀을 뻘뻘 흘리듯 하얀 성에를 뒤집어쓴 양말은 아버지의 슬픈 자화상이기도 했다. 모락모락 저녁연기가 피어올라 무채색 하늘을 하얗게 수놓아갈 즈음 쇠죽 끓는 냄새가 가슴으로 스며들었다. 얼큰하지도, 칼칼하지도, 달거나 짠맛도 아닌 아버지의 진실한 삶의 향기였다. 온 집안을 따뜻함으로 감싸주시던 아버지의 우직한 냄새가 나는 좋다.

애틋했던 기억들을 뒤로하고 산길을 내려온다. 내 안에 배어있는 삶의 향기는 무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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