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밥 한 그릇

2021.11.17 15:17:42

박영희

겨울로 접어드는 계절 언저리에 빛을 잃은 노란 산국화의 향기가 애틋한 여운으로 남는다. 초록이 바랜 덤불 사이로 작은 열매들이 마지막 햇살을 즐기고 있다. 새들은 높이 날며 길을 떠나고, 나무 끝에 나부끼는 마른 잎의 몸부림은 갈 곳 몰라 헤매는 영혼처럼 처연하다. 어머니와 마지막 작별을 고하던 밤도 바람에 흐느끼는 잎새 소리가 문밖을 서성거렸다.

슬픔도 애달픔도 곰삭은 세월이건만 겨울이 시작하는 길목에 아련히 찾아드는 그리움, 헛헛하고 애잔한 마음을 달래려 늙으신 어머니와 나들이 삼아 다니던 육거리 시장으로 나서본다. 무심천 둑을 따라 표표히 흐르는 억새 물결에 흘러간 시절도 덩달아 너울거린다. 남주동 쪽 시장 어귀에 이르자 건강원에서 달이는 진한 약초 냄새가 마중을 나왔다. 은근한 향기가 내 몸을 감싸며 어머니의 체취처럼 한기를 녹인다. "나에게 어쩌면 마지막 나들이가 될지도 모르겠구나"하시던 미수를 향한 어머니의 나직한 모습이 저만치 나래를 편다. 마침 김장철을 맞아 시장은 더욱 활기가 넘친다.

석교동 파출소가 있던 장터 사거리에 서니 체육사, 유리점, 수예점…. 어슴푸레한 옛 풍경들이 고리를 문다. 문명의 옷을 입은 채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육거리시장은 여전히 후한 인심과 넉넉한 인정이 사람 사는 냄새를 풍기고 있다. 여기저기 호객하는 소리조차 시장에서만 볼 수 있는 정겨움이 아닌가, 품바 차림을 한 엿장수가 걸쭉한 만담을 토해내자 시장은 한바탕 웃음바다가 된다.

사람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형성됐다는 시장은 우리네 삶에서 떼어낼 수 없는 공간이다. 어릴 적 시내 근교에 농사를 짓던 부모님은 살림이 그리녹녹지 않았다. 장날이면 시장에 나가 채소를 팔고 오시던 어머니에게 채소전, 어물전, 난전, 약전, 싸전이라는 골목들은 내 유년의 낯익은 언어이기도 하다. 마침 시계방 옆 골목으로 걸음을 옮겼다. 노쇠한 할머니 몇이서 묵나물과 고사리 그리고 짓 고추를 팔고 있다. 조막만 하게 늘어놓은 좌판에 마음이 시리다. 늙고 야윈 몸으로 일손을 놓지 않는 이유는 무얼까? 괜한 연민이 걸음을 붙들고 어머니 생각에 젖게 했다. 허기진 세월, 저잣거리 난전에서 열무 다발을 이고 다녔을 어머니의 서글픈 잔상이 눈시울을 적신다. 양은 다라에 푸성귀를 이고 장고개를 넘던 어머니의 고단한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마침 옹기전을 지나려는데 추억이 부른다. 신혼 초기에 항아리를 사러 어머니와 옹기전에 왔던 기억이 난다. 매끈하고 아담한 항아리를 두어 개 골라놓고는 허름한 국밥집으로 데리고 가셨다. 세월을 정제하듯 은근한 장작불에 긴 시간 우려낸 국물이 뚝배기에서 바글바글 끓었다. 진국을 먹이려는 듯 아무 말 없이 고명을 얹어 거품을 걷어주시던 어머니의 오래된 사랑이 되살아나는 것 같다.

아련히 밀려오는 추억에 옛날 어머니와 들렀던 국밥집의 따끈한 국물 생각이 났다. 골목 후미진 곳에 세월을 간직한 채 대를 잇는 국밥집이 보인다. 뉘엿한 볕을 뒤로하고 덜컹대는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섰다. 따뜻한 국물 한 그릇에 위안을 받으려는 듯 탁자마다 손님들이 떠들썩하다. 일상에 지쳐 보이는 사람들, 애환과 눈물로 채워진 사람들, 세상을 타박하며 술잔을 기울이는 젊은이도, 저마다 뜨거운 국물을 후후 불며 뚝배기를 비우고 있다. 나는 혼자 계면쩍어 벽을 보고 앉았다. 살그락 소리가 들리더니 아주머니가 국밥을 내어온다. 자글자글 끓고 있는 뚝배기에 오종종하게 잔거품이 모여든다. 거품을 걷어내고 구수한 진국에 공깃밥을 욱여넣었다. 추억을 만난 순댓국에 헛헛하던 마음은 포만감을 더하며 이마에 구슬땀이 맺혔다. 삼삼오오 시끌벅적하던 손님들이 값싼 국밥 한 그릇에 흡족하다는 듯 자리를 뜬다. 빈 그릇을 치우는 주인 아낙에게 국물맛이 좋다고 인사를 건네자 적당한 때 거품을 걷는 게 진국을 맛보는 비결이라고 귀띔을 해 주었다.

옅은 어둠이 내린다. 시장 골목을 빠져나오는 동안 푼푼한 뚝배기에 보글보글 끓던 국물과 거품의 춤사위?가 떠나질 않았다. 거품을 걷어주시던 어머니도 가고 없는데 화갑을 지난 내 삶에 헛된 거품은 없을까, 국밥 한 그릇에서 무언의 스승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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