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로의 길에서

2021.08.18 15:52:03

박영희

수필가

이른 아침 방충 문 사이로 불 지피는 매캐한 냄새가 손님처럼 들어온다. 나뭇가지와 마른 풀을 태우는 이 어둑한 향기는 얼마 만에 맡 보는 시골 냄새 던가, 땔감조차 녹녹지 않던 시절, 생나무에 불을 붙이던 어머니의 젖은 눈물이 하얀 연기처럼 아른거린다. 비루했던 시절의 기억들은 곰삭은 세월 탓일까, 매운 내는 간데없고 반갑기만 하다. 숨을 크게 내쉬다 한 모금 그리움을 들이마셨다.

치매가 점점 심해진 구순의 노모를 시골에 홀로 둘 수가 없어 요양원으로 모셨다는 친구의 목멘 소리는100세 시대를 살아가는 지금 우리들의 또 다른 애상으로 들렸다.집이 비었으니 고향에 가서 쉬다 오자는 친구의 제안에 갑자기 또래 여섯이서 시골로 소풍을 떠나온 셈이다.

사람이 나이를 먹을수록 동안이 아니라 동심을 가꾸어야 한다고 한다. 내가 살던 고향은 산업화와 도시계획에 떠밀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빛바랜 추억들만 이따금 빌딩 숲을 기웃거린다. 잃어버린 고향 생각에 한동안 귀촌을 꿈꾸기도 했으나 나이가 들수록 병원 가까이 살아야 한다는 원로의 말에 도회지에 사는 삶은 가끔 갈증이 나기도 한다. 그리움의 책장을 펴듯 사소하던 유년의 기억들이 초로의 길 위로 하나둘 앞질러 간다.

마을 초입의 늙은 느티나무는 길게 그늘을 치며 우릴 반긴다. 어머니가 떠난 빈집에는 잡풀들이 주인행세를 하고 있었다. 바지랑대 사이로 해진 난닝구와 몸빼가 널렸을 빨랫줄엔, 잠자리 한두 마리만 날아오를 뿐 집안은 고적했다. 헛간 옆 텃밭에 다 여문 옥수수는 긴 수염을 늘어뜨리고, 묵은 낫, 괭이, 싸리 빗자루에는 거미줄만 켜켜이 쌓여있다. 굴뚝이 있던 자리에 스레트로 해인 간이 부엌이 눈에 띈다. 함석 아궁이와 양은 솥 그리고 타다남은 재와 아무렇게나 던져 놓은 부지깽이는 내 고향의 여름날 정겨운 이야기처럼 도란거린다. 양푼에 담긴 삶은 감자와 열무김치에 소면을 말아 놓은 석양의 밥상머리에 먼 옛날 입가에 묻은 뻘건 국수 국물 자욱이 들 마루 끝에 쪼그리고 앉는다.

너른 방에 짐을 풀고 모처럼의 여유를 즐기려는데 벽걸이 선풍기가 꼽사리를 끼려는 지 달달 거리며 요란한 소리를 낸다. 고갯마루에 걸린 하얀 달빛처럼 예순다섯 앳된 할머니들의 소소한 이야기는 화수분이 되고, 두고 온 손주들과의 애증도 잠시 쉼표를 그린다. 인기척 없는 친구에게 "자는 거야? "라고 물으니 어느새 고요만 흐르고 기운 달빛 새로 이따금 들리는 풀벌레 소리가 내 말동무를 하고 있었다.

새벽부터 그을음 냄새를 풍기며 정성을 다해 끓여 낸 친구의 토종닭에다 우정을 반찬 삼아 조반을 들었다. 시골 아낙의 차림으로 나란히 어머니의 밭으로 나간다. 오랜 가뭄으로 농작물은 타들어 가고 헉헉거리는 콩잎 호박잎 팥잎은 축 처져 더욱 애처롭게 보였다. 심어만 놓고 요양원으로 가셨다니 풀로 뒤덮인 들 깨밭에선 노모의 손길을 기다리는 눈치다. 어머니는 두고 가신 들깨 모 생각을 하실 수 있을까, 인생이 이토록 덧없고 허무한 것이라니 애잔한 마음만 교차한다. 과거를 죄다 잊어버렸다는 어머니 생각에 풀밭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김을 매기로 했다. 농촌에 뿌리를 두고 살아온 우리건만 오랜만에 잡은 호미질은 잡초의 질긴 근성 때문에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뙤약볕에 내어준 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고 어설픈 노동의 결과는 그나마 밭의 면모를 드러냈다. 한평생 흙에 순응하며 자식을 위해 짊어져야만 했던 삶의 무게를 가늠할수 없건만 마다하지 않고 묵묵히 감당하셨을 우리네 어머니, 고춧대의 시들한 몰골처럼 가련히 떠오른다. "자는 듯이 가야 할 텐데"라고 입버릇처럼 말했을 노모의 마지막 소원에 한 줄 기도를 올려 드린다.

밭둑으로 농익은 단호박들이 빠꼼이 얼굴을 내밀고 웃는다. 호박을 따서 한 무더기 머리에 이고 고랑을 거니는 초로의 소풍은 여느 피서의 순간보다 행복했다. 어디선가 가을 냄새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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