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길을 걸으며

2021.01.20 17:30:00

박영희

수필가

새해벽두에 많은 눈이 내린다. 사락사락 내리는 싸락눈은 코로나로 지친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듯 포근히 쌓여간다. 신의 선물인양 온 누리를 하얗게 덮은 순백의 세상은 왠지 심연의 묵은 때를 씻고 마음을 단장하라는 묵시처럼 보인다. 오늘처럼 눈이 오는 날이면 새벽부터 눈을 쓸어 길을 먼저 내어 주시던 아버지 생각이 떠오른다. 마냥 설레던 젊은 날의 환희보다 흰 도화지처럼 펼쳐진 설경에 나는 어떤 그림을 그려야하나 느릿하게 숨 고르기를 해 본다. 모든 허물을 덮어 줄 것 같은 하얀 눈처럼 더 맑고 순결한 영혼으로 누군가를 위해 사랑해야지…….

어느새 함박눈으로 변한 눈송이들이 유리창에 부딪는다. 능선을 따라 펑펑 쏟아지는 눈발을 타고 마음은 어릴 적 고향집으로 향한다. 마루 끝에 까치발을 하고서니 아장아장 놓여있는 장독대와 그 곁에 서있는 고욤나무, 그리고 마을언덕에 있는 예배당과 어머니가 넘어 다니시던 장 고갯길까지 이불을 깔아 놓은 듯 하얗다. "쓰윽 싹 쓰윽 싹" 밤사이내린 눈을 쓰시던 아버지의 싸리비소리가 새벽잠을 깨운다. 오빠들은 온종일 골목을 휩쓸고 다니며 참새 몰이를 하며 뒤 안과 담장에 새덫을 놓았다. 벼이삭을 달고 이엉위에 앉아 참새를 기다리던 한가로운 새덫풍경이 한 조각 그림처럼 아직도 눈에 선하다. 교회에 오르는 언덕배기에 썰매 장을 만들어 놓고 하루 종일 비료포대로 썰매를 타던 일, 그때 그 동무들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그날의 악동들도 지금쯤 그날을 회상하며 웃음 짓고 있겠지...아이들의 행복한 웃음소리에 짧은 겨울 해 저물어 갔다. 햇살에 눈이 녹아 처마 끝에 달린 고드름을 따 먹으며 추위도 아랑곳없이 겨울을 즐기던 유년의 추억이 문득 그리워진다.

빌딩숲에 사는 현대인들에게 나의 옛 추억은 빛바랜 이야기이건만 황토 산 초록나무들의 청솔바람소리를 들으며 어린 내 손을 잡고 산에 올라 시조가락을 읊어 주시던 아버지의 겨울연가는 이맘때마다 마음에 눈꽃을 피운다.

나뭇가지마다 설화를 연출해 놓고는 눈이 멈추었다. 마침 외손녀가 달려왔다.

추억이 부르는 소리에 아이와 눈함께 자주 가는 산책로로 나서본다. 겨울 왕국이다. 우리는 눈사람을 만들기로 했다. 이 얼마마한 일인가, 아이는 손이 시리다 하면서도 조막막한 눈을 굴려 드디어 나지막한 눈사람을 만들어 세웠다. 나뭇가지를 꺾어 눈썹 입 코를 만들고나니 겨울 왕국의 울라프생각을 하는 모양이다.

아이의 마음에 할머니와의 작은 추억을 새겨주려고 둘이서 다시 눈길을 걸어본다.

빈 벤취 위에도 느티나무위에도 그 옛날 내 가살던 고향의 정취가 담긴듯하다.

눈은 근본이 얼음이면서도 속은 따듯한 내강외유가 아니던가· 쭉 펼쳐진 눈밭은 보드랍고 포근해 보인다. 아무도 가지 않은 눈길 위로 걸음을 옮길 때 마다 마치 하얀 건반을 밟는 듯 뽀도독 뽀도독 발끝에 이어지는 맑은 소리가 좋다. 무심코 거니는 눈길위로 한때는 흰 눈처럼 살고 싶다는 다짐을 얼마나 많이 했던가하는 생각에 잠겨본다. 돌아보면 얼룩덜룩 정갈하지 못하게 살아온 삶의 애증이 이곳저곳 고개를 드는 듯 보인다. 마냥 즐겁게 만 바라보던 흰 눈에 모처럼 철이 드는 걸까· 미끄러운 눈길에 한바탕 뒤뚱거리고 나서야 나의 조무래기 같은 마음이 미안해진다. 명자나무를 하얀 지붕으로 감싸고 있는 눈에게 거무튀튀한 내 마음을 죄다 가려 달라고 당부하며 눈밭에 서서 나를 꾸짖어 본다. 아이는 그저 신이 나서 더욱 재잘 거린다.

신년에 유난히 눈이 많이 온다. 겨울에만 누릴 수 있는 깊은 설렘이지만 눈 속에 담겨진 아련한 추억을 뒤로하고 새해엔 좀 더 맑은 영혼으로 겸허히 살고 싶다. 눈 은삭풍이 마구 휘젓는 대로 몸을 맡기며 후미지고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앉는다. 산천과 들길로 초가지붕위로 흩어져 내리는 눈발의 순리는 어쩌면 우리의 허다한 욕망을 내려놓으라는 섭리가 아닐까?

벌써 새해가 밝은지 며칠이 지난다. 차분한 마음으로 조금만 더 마음을 비우고 조금만 더 배려하는 마음을 실천한다면 지난해 보다 삶의 질이 나아지겠지, 눈밭에 새겨보는 자신과의 다짐이 꼭 이루어지는 신축년이 되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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