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을 먹고 난 깜깜한 밤. 하늘에는 아미같은 그믐달이 어스름하게 비추던 날 이웃집 동급생 여학생이 조용히 부른다. 뾰로통하고 퉁명스런 말투와 함께 동급생의 손에서 전해진 건 같은 반 여학생의 편지다. 꽃무늬 봉투에 담겨 전해진 편지에는 그 여학생의 마음이 깨알같은 글씨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점점 사그라져 가는 그믐달빛 아래서 읽고 또 읽고 얼마나 많은 시간 설렘에 마음 따뜻했는지 모른다.
요즘 거리에는 공중전화 부스가 사라졌다. 우체통도 안 보인다. 우리 사회가 급속한 정보화 사회가 되면서 사람들의 손에는 의레껏 휴대전화기가 들려있다. 공중전화 부스 앞에서 길게 늘어선 줄을 보는 건 이젠 먼 옛이야기가 되어버렸다. 메주 냄새 가득한 윗방 구석에 조용히 엎드려 누군가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 본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터. 정성을 다해 상대를 떠올리며 마음을 담아 쓴 편지를 보내고 얼마나 많은 시간을 가슴 졸이며 기다렸던가? '지금쯤 편지가 도착했을까?' '답장은 썼을까?' '부쳤을까?' 하루에도 몇 번씩 사립문 틈을 확인하곤 했었다. 기다리는 동안 얼마나 많은 기대와 즐거움과 설렘이 있었는지 모른다.
이젠 이 모든 일을 휴대전화가 대신하는 시대가 되었다. 기다림은 사라졌고, 수시로 울려대는 알림 소리에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다. 어디 이뿐이랴? 요즘은 물건도 참 쉽게 사고판다. 온라인을 통해 주문하면 단 하루 만에도 물건이 배달되어 온다. 물론 단 하루라도 기다리는 설렘이 있긴 하겠다. 그러나 예전과 같은 오랜 기다림에서 느낄 수 있는 기대와 설렘은 없다. 이런 삶의 문화가 학교 현장에도 고스란히 투영되어 나타나는 것 같아 씁쓸하다.
비록 지금은 미숙하고 어눌하지만 언젠가는 성장하고 발전하리라는 믿음이 있어야 하거늘 교육 현장에 그런 것이 잘 보이지 않는다. 교사는 아이들을 기다려 줄 줄 알아야 한다. 여기서 기다림이란 지금의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여 주는 것이다. 현재의 아이가 가지고 있는 상황과 특성을 이해하고 아이가 스스로 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 주어야 한다. 기다림은 무조건 참는 것이 아니다. 기다림은 기대요, 설렘이며 믿음이다. 나와 기준이 달라도 '너니까 인정해 줄게.'하는 마음이 곧 기다림이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우리 아이들이 아주 조금씩 성장하고 발전하는 모습을 지긋이 기다려 주고 있는가? 반문해 볼 필요가 있다. 너무 빠른 결과를 바라는 조급함이 아이들의 성장을 방해하고 있지는 않은지 꼼꼼히 돌아보아야 한다. 교사뿐만 아니라 부모와 이 시대의 어른이라고 하는 모든 이들의 과제다.
교육은 기다림이어야 한다. 그래서 교육을 백년지대계라고 했다. 지금 무언가를 투입하면 금방 어떤 결과가 나오는 기계가 아니다 교육은. 가랑비에 옷 젖듯 지금의 가르침이 조금씩 조금씩 스며들어 충분히 시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나타나는 것이다. 아이들의 성장은 한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지금 보여지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면서 분명 나아질 모습에 대한 기대와 설렘으로 아이들의 행복한 성장을 믿고 기다려야 한다 우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