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2021.12.20 15:17:18

임영택

충북도교육문화원 문화기획과장

'언제 밥 한 번 먹자.' 오랜만에 만나는 지인과 나누는 대화 중 빠지지 않는 대화의 한가지다. 거리에 서서 반가운 마음을 표현하며 서로 살아가는 짧은 이야기를 나누고 이내 헤어져야 할 때가 되면 꼭 하는 말 '언제 밥 한 번 먹자.' 나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도 흔하게 하는 말일게다. 그런데 그렇다고 이 말을 꼭 지키고자 하는 이는 별로 없는 것 같다. 또한 상대가 이 말을 꼭 지킬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도 별로 없는 듯 하다. 그저 지나가는 상투적인 말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런 빈 약속들이 꼭 나쁘다고만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면 '죽을 때까지 평생 사랑할게.' '언제 같이 여행 가자.'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 줄게'처럼 지키지 못할 약속의 말들이 참 많다. 하지만 어찌 보면 이런 말을 듣는 순간만큼은 설렘과 기쁨, 감동을 주지 않았을까? 아주 잠시라도 말이다. 이렇게 사람들은 때때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흔한 약속을 하고 서로를 위로하며 오늘을 사는 건 아닌가 싶다.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배웠고, 삶을 살면서 한 번 한 약속은 꼭 지키기 위해서 노력하며 살아왔다. 만나기로 한 시간보다 반드시 10분 먼저 약속 장소에 나가서 기다리는 것은 내가 나 스스로에게 주어준 책무다. 새 학년이 시작하는 3월 첫 날은 정갈한 몸과 마음으로 아이들을 만나기 위해서 꼭 대중목욕탕에 가서 몸을 깨끗하게 했다. 아이들과 만나서는 차별하지 않고 편애하지 않겠다고 단단히 약속했다. 그렇게 1년이라는 시간 동안 아이들과 20평 남짓 교실 공간에서 생활하면서 나는 얼마나 약속을 잘 지켰을까? 1년을 갈무리하는 때가 되면 늘 하던 성찰이었다. 분명 차별하거나 편애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건만 학년말에 돌아보면 어떤 아이에게는 기쁨과 행복으로, 또 어떤 아이에게는 누구에게도 말 못할 슬픔과 고통으로 남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이들과 한 약속이기에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려 애를 썼건만 나 스스로 만족스럽지 못하다 느낀 건 아마도 아이들과의 약속을 온전히 지키지 못했음을 아이들의 표정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던 까닭이리라.

해마다 소복하게 눈 내린 이른 새벽 아무도 밟지 않은 넓은 운동장에 나가 운동장 저 쪽 끝 느티나무를 목표로 앞만 보고 걷는다. 목표 지점인 느티나무에 이르러 뒤를 돌아보며 내가 걸어 온 발자국을 확인한다. 분명 똑바로 걸어왔는데, 발자국이 춤을 추었다. 뱀처럼 꼬불꼬불한 발자국은 나의 삶의 여정을 닮았다. 아이들에게도 나처럼 눈 내린 날 아침 조용히 나와 운동장을 걸어보라 주문한다. 늘 바른 가치관으로 올곧은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지만 세상 일이 그렇게 마음먹은 만큼 뜻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이는 자신과의 약속이며 세상을 향한 약속이다. 아울러 세상을 살아가면서 해야 하는 일을 하기로 한 약속이거나 하면 안되는 일을 하지 않기로 한 약속을 말없이 지키며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 덕분에 지금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과 누릴 수 있는 것들이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면 좋겠다.

약속을 지킨다는 건 자신에 대한 믿음을 키우는 것이요, 세상을 살아가면서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한다는 의미다. 약속이라는 것이 항상 잘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지키기에 버겁고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살아가는 순간순간 타인과의 약속뿐만 아니라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는 삶이야말로 진정 행복한 삶이 아닐까? 한 해를 갈무리하는 시점에 서서 지나온 나의 삶을 톺아보며 다시 새롭게 달려갈 길에 대해 스스로 약속의 조각들을 모아본다. 비록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약속을 지킴으로써 더 단단해질 나를 그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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