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조루, 타인능해(他人能解)의 쓸쓸함

2021.04.14 17:06:02

정익현

건축사

온 세상이 꽃이다.

이제는 꽃도 피는 순서를 잊은듯하다. 지역이나 종류에 관계없이 일시에 피어나 어리둥절하다. 주말마다 비 소식에 발이 묶이다가 비가 겨우 그친 틈을 타 구례 화엄사에 갔다. 그곳에는 한국 4대 매화의 하나인 '화엄매'가 있다. 구례는 길옆이 온통 벚꽃이라 멀리서도 어디가 길인지 알겠다.

국보 제67호 각황전 옆 홍매는 흐린 날씨에 꽃잎이 거의 절반은 졌는데도 요염하다. 전해지는 명성 그대로다. 청정도량에 '요염한 매화'라니! 그러나 달리 표현할 말을 찾지 못했다. 땅에서부터 솟은 두 개의 굵은 대가 스치듯이 살짝 비틀어져 용틀임한 모습은 둘 중 하나가 없었다면 이처럼 묘한 자태를 만들지 못했으리라. 2층 건물 높이의 수령 300 년이 넘은 작지 않은 나무가 자리하기엔 다소 비좁았지만 주변 전각과 각황전 추녀의 날렵한 풍경(風磬)이 만들어 내는 아취(雅趣)는 한 폭의 그림이었다.

화엄사를 나와서야 그곳에 만개한 벚꽃과 동백에 눈길 한 번 못 주고 나왔음을 알았다. 집으로 곧장 오기에는 못내 아쉬워 '운조루(雲鳥樓)'에 갔다. 운조루 터는 영남 3대 길지(吉地)의 하나이다. 정조 때 1776년 류이주가 집을 짓고 도연명의 '귀거래사'에서 운(雲)과 조(鳥)를 빌려와 당호를 지었다.

오랜만에 마주한 운조루는 옛 모습 그대로 단아했다. 가난한 이웃에게 식량을 나눠준 쌀뒤주 '타인능해'도 투박한 모습 그대로, 그 자리에서 세월의 더께가 쌓이고 있었다. 운조루의 명성은 건물에 있지 않고 쌀뒤주에 있다. 쌀뒤주를 내어 놓고 배고픈 사람 누구나 쌀을 가져가게 했으니 뒤주 아래 여닫이에 새겨 넣은 '타인능해'(누구나 쌀뒤주를 열 수 있다) 네 글자에 머리가 숙여진다. 타인능해 옆을 지나 뒤란 낮은 돌담 앞 동백나무 아래 목이 뎅겅 잘린 동백. 처연(悽然)히 누운 꽃송이 오히려 눈부시다.

운조루를 나오면서 예전과 달리 대문에 평상을 놓고 입장료 1천원을 받고 있는 할머니에 신경이 쓰였다. 이 동네 사는, 형편이 어려운 할머니인 줄 알았는데 이 집 주인이라는 말에 적이 낙담했다. 평상에는 팔려고 내놓은 표고버섯과 쑥이 있었다. 입장료가 어디에 쓰이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보기에 안쓰럽고 불편하다. 며칠 후 구례군청에 몇 가지를 물어보았다. 입장료를 받는 분이 주인이고, 건물은 국가에서 유지 보수를 해 주지만 입장료에 대해서는 사유재산이라 관여하기 어렵다는 답을 들었다.

입장료가 얼마든 간에 무인 시스템으로 하고 물건을 파는 좌판은 아예 없애거나 대문을 피하여 어느 한쪽으로 옮기면 어떨까 싶다. 얼마나 형편이 어려운지 몰라도 조상이 덕을 쌓은 후손의 일이기에 더욱 씁쓸하다. 땅이 지닌 명당의 기운보다 주위에 베푼 선행으로 6.25 때 빨치산의 발호에도 운조루는 멀쩡했으니 조상이 행한 가진 자의 도덕적 의무를 실천한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덕이 아닌가 한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프랑스어로 '높은 신분에 따른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를 말한다. 고대 로마에서는 병역 의무와 기부 활동을 최고 영광으로 생각하였다. 그 정신은 오늘날 여러 나라에 영향을 주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정조 때 제주의 거상 김만덕, 경주 최부자집, 독립운동에 막대한 전 재산을 바친 우당 이회영 형제들, 우리 문화재를 지킨 전형필 선생 등을 꼽을 수 있다. '왕관을 쓴 자, 그 무게를 견뎌라' 했지만 최근 우리나라에서는 그나마 얼마 되지 않은 노블레스 오블리주 사례들을 가진 자의 갑질이 덮고 있어 안타깝다.

그러나 부의 세습을 거부하고 희망의 빛을 쏜 사람들이 있다. 바로 IT 벤처 젊은 갑부 김범수 카카오 의장과 김봉진 우아한 형제들 의장이다. 그들은 각각 재산의 절반인 5조 원과 5천억 원을 기부하겠다고 선언했다. 김범수 의장은 평소 좋아하는 에머슨의 시 '무엇이 성공인가'에서 '자신이 태어나기 전보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놓고 떠나는 것'이라는 시구절에 깨달음을 얻었다 한다. 그들이 만들 살기 좋은 세상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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