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이 없어도 인간의 도리를 다하면서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사람을 일컬어 우리는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 한다. 반면 '법대로 합시다'는 인간적으로 해결되지 않을 때 하는 말이다. 고조선 시대 불과 '여덟 개의 법(八條禁法)'으로 나라를 다스린 이래 이제 우리는 법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역사를 보면 기원전 2백여 년 전국시대 진(秦) 나라는 법가(法家) 사상을 이념의 토대로 하여 통일 제국을 건설했다. 법가는 법에 의한 강력한 통제와 권위에 대한 절대복종을 통해서만 사회적 통합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은 통일 제국 건설에는 맞았을지 모르나 평화 시 나라를 잘 다스리는 데는 실패했다. 통일 후 '군주의 역량'에 대해서 간과한 것이다. 시 황제 사후 간신 '조고'의 전횡으로 진나라는 15년 만에 멸망한다. 국가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에 대한 성찰이 없었던 것이 법가사상의 허점이 아닌가 한다.
이와 다르게 백수건달에서 한(漢)나라를 세워 영웅이 된 '유방(劉邦)'은 진나라의 강력한 법치와 가혹한 형벌을 부정함으로써 백성들의 지지를 받는다. 이른바 '약법삼장(約法三章)'으로 진나라 법을 모두 버리고 법 3개만 남긴다는 유방의 말은 가혹한 법에 진절머리가 난 백성들에겐 복음과도 같았다. 유방은 민생과 국가의 안녕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대중의 신뢰를 얻었을 것이다.
법가의 중심에 있었던 한비자(韓非子)는 '인의(仁義)'가 아니라 '법'으로 백성을 다스려야 한다, 백성의 생각에 휘둘리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오늘날로 치면 '민의(民意)'를 져버린 독재자 편에 선 위험한 생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비자의 말이라고 전해지는 '나라가 망하는 10가지 징조'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오늘날에도 들어맞는 경구(警句)임에 틀림없다.
서양의 법에 대한 생각은 어떤지 살펴본다. 1784년 발간된 《법의 정신》에서 '몽테스키외'는 삼권분립을 최초로 주장하며 권력 간의 견제와 조화를 말했다. 그는 "법이란 초월적인 명령이 아니라 그 나라의 풍토, 풍속, 종교, 국민성 등에 기반을 둔 국민의 정신인 '법의 정신'에 필연적으로 관련되어 있다"라고 주장했다. 그의 수많은 어록 중에 눈여겨볼 만한 대목이 있는데, '우리는 권력이 권력을 남용할 수 없도록, 사물의 배치를 통해 권력이 권력을 멈추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즉 권력 남용을 견제하는 장치의 필요성을 말한 것이다.
우리는 비상계엄 선포와 헌법재판소의 탄핵 선고를 겪으면서 법에 관심을 갖게 됐고 원치 않은 법 공부도 하게 됐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공정한 법 집행이 오늘날만큼 절실(切實) 하게 요구된 때도 없다. 국민들은 사법(司法)의 영역에 정치가 개입됐다고 여겨 법조계를 신뢰하지 못하면서 '법은 만인에 평등한가?'를 다시 생각하게 됐다.
사람들은 법을 몰라도 사는데 큰 지장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 말을 바꾸며 '이현령 비현령(耳懸鈴 鼻懸鈴)' 식의 법 해석은 피로감을, 납득할 수 없는 탄핵선고의 지연은 불안감을 국민에게 주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었던 사회, 그럴 거라고 믿었던 것에 대한 의심을 하게 되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다.
우리 국민은 균형감각으로 극단주의를 제어할 수 있고, 갈등과 대립을 해소할 수 있는 회복력 또한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의 자정능력으로 불확실성을 제거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지만 국가의 위기 앞에 언제나 국가를 구한 것은 국민의 힘이었으니, 극복할 거라고 서로를 격려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