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햇살이 눈부신 점심나절 가족 채팅방에 남편이 사진 한 장을 올렸다. 작고 가냘픈 몸에 똘망똘망한 눈을 갖고 있는 귀여운 모습이었다. 사진 속에는 "우리 아이 잘 키워주세요."라는 편지도 보였다. 무슨 사연이 있는지 친구가 운영하는 가게 앞에 두고 갔단다. 평소, 강아지 키우고 싶다고 노래하던 아들 얼굴이 떠올랐다. 이심전심 이라 했던가! 그 사진을 보았는지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구구절절 그 사연을 전달하는 아들의 목소리는 벌써 그 깜찍한 모습에 푹 빠졌음을 알리는 듯 들떠있다. '누가 버렸을까·'하며, 버려진 녀석에 대한 측은지심(惻隱之心)으로 걷어주길 바라는 마음이 전해진다.
몇 해 전, 십여 년 함께했던 강아지가 갑작스럽게 죽었던 일이 생각난다. 외출했다 돌아오면 반갑게 맞아주던 모습을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으니 너무도 허전했었다. 애지중지 여기던 자식을 잃은 것처럼 상심은 컸었다. 나도 그러한데 강아지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아들은 오죽했을까. 바쁘다는 이유로 많은 시간을 함께하지 못한 부모보다도 더 많은 정을 나누었을 텐데. 강아지의 죽음은 아들에게 큰 상처였다. 늘 밝은 얼굴이었던 아들은 말수도 적어졌다. 자신이 잘 돌보지 못해서 죽었다는 죄책감으로 괴로워했다. 그렇게 힘들어하는 아들을 보며 다시는 반려동물을 키우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사진 속의 강아지를 보고 있는 마음이 편하지가 않다. 초롱초롱한 눈빛이 자꾸만 어른거린다.
퇴근 후 집에 들어서자마자 눈을 의심해야 했다. 사진에서 본 편지와 강아지가 있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의아했다. 빨리 되돌려주라고 목소리를 높였으나, 이제 겨우 몸을 가누는 강아지와 눈을 마주친 순간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미를 잃은 새끼 고양이에게 우유 젖병을 물려주시던 모습이 눈가를 적신다. 집도 없이 종이박스에 신문지를 깔아 넣고 보내진 '저 귀여운 것을 어찌 되돌려 보낼까'라며,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마음이 분주해졌다. 녀석에게 필요한 물건을 사러 아들과 함께 마트로 향했다. 마치 출산을 앞두고 아기 용품을 준비하는 엄마의 마음처럼 설렜다. 아들은 이리저리 둘러보며 꼼꼼히 살펴 담는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살 때는 한번 둘러보고 쉽게 결정하더니, 하나하나 고를 때마다 공(功)을 들였다. 물건을 사들고 돌아와 태어날 아기의 방을 꾸미듯, 기거할 자리를 만들어 주고 장난감도 넣어 주었다. 낯선 환경 탓인지 가만히 눈치만 보고 앉아 있던 녀석이 신기한 듯 장난감을 발로 톡톡 친다. 그런 녀석을 보니 웃음이 나온다. 엄마가 된 듯 기분이 묘하다. 아들은 마치 막냇동생이라도 안아주듯 가슴에 꼭 안고 얼굴을 비벼대며 "까꿍 까꿍"한다. 귀여워 어찌할 바를 모르며 함박웃음을 짓더니, "엄마, 이름을 뭐라고 지을까요·"하며 묻는다. 여러 이름이 오고 갔지만, 가을에 받은 선물이니 '가을이'로 이름을 지었으면 좋겠단다. 그렇게 가을이는 우리와 함께 보내게 되었다.
이제 제법 자라서 퇴근해 들어가면 온갖 애교를 부리며 같이 놀아달라고 막무가내로 따라다닌다. 군것질이 필요하면 꼬리를 흔들어 대며 넙죽 엎드린다. 아직 일정한 장소에 배설을 하지 못하는 녀석을 야단치면, 칭얼대며 아양을 떨기도 한다. "아기 엄마가 하루에 열 번 거짓말 한다"라는 말처럼 내가 요즘 그렇게 하고 있다. 가을이가 한 가족이 되면서, 모두 모여 이야기하는 시간이 늘었다. 언제나, 가을이의 일상을 주제로 삼는다. 살림살이도 마음대로 내놓지 못하는 불편함을 하소연하면 아들은, "엄마, 막둥이라 생각하고 예뻐해 주세요. 얼마나 귀여워요."한다.
늦은 나이에 둔 막둥이의 재롱에 푹 빠져 일찍 귀가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알 것 같다. 어린 생명을 거두고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행복을 가르쳐 준 아버지가 그리운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