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화로 눈부신 새벽에

2015.12.27 18:39:15

송보영

수필가

밤새 쏟아져 내린 함박눈으로 하여 온 대지는 순백의 물결로 출렁이고 있다.

차창 밖을 스치는 산자락엔 은빛 날개를 번쩍이며 서있는 겨울나무들로 가득하다. 새하얀 눈으로 뒤 덮인 그 가지들에서는 금방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새벽 미명의 고요를 뚫고 비상할 것 같은 백조들의 모습이 연상된다. 온 사위가 고요와 적막으로 가득 한 중에도 미세한 생명의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설화로 눈부신 겨울 산의 수런대는 소리다. 그 소리는 아주 여린 것 같지만 강한 떨림으로 내 마음의 문을 두드려 댄다. 세월의 때가 끼여 폐부 깊숙한 곳으로 침잠되어 버린 감성들을 향해 어서 깨어나라고 깨어나서 새벽을 흔드는 소리 없는 함성을 들어보라고 속삭여댄다. 빛바랜 겨울나무들 위에 하늘의 축복으로 빚어진 순백의 향연. 이 찬란한 아름다움을 어찌 몇 줄의 글과 몇 마디의 감탄사로 표현 할 수 있을까.

몸속을 파고드는 추위와 졸음을 참으며 남편을 재촉해 길을 나서길 잘했구나싶다. 항상 그래 왔듯이 오늘도 우리 부부는 정해진 목적지도 없이 설경에 취해서 새벽의 정적을 가르며 어디론가 달려가고 있는 중이다. 느닷없이 길을 떠나는 이러한 일들은 어느 샌가 우리부부의 일상 속에 깊게 자리하고 있다. 어쩌면 그건 지칠 줄 모르는 나의 방황 때문인지도 모른다. 온 산야가 초록의 물결로 차오르고 봄의 여신들이 꽃비가 되어 쏟아져 내릴 때. 푸른 달빛에 취한 산새들이 밤새 울어대는 여름밤이나 소슬한 갈바람을 타고 흐르는 산국의 향기가 산자락에 넘쳐날 때면 항상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몸살을 앓곤 한다. 함께한 세월의 무게 탓인지 요즈음은 남편이 먼저 떠날 채비를 서두르기도 하지만 말이다. 오래 살다보면 부부는 서로 닮게 마련이라던가.

이런 홀가분한 나들이는 우리 부부의 삶에 활력소가 되어준다. 메마른 일상 속의 찌꺼기들을 훌훌 털어 버리고 비인 가슴이 되어 새로운 채움을 준비하는 소중한 시간이기도 하다. 오늘 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설원을 바라보며 떠나는 하룻길 나들이에서 내려놓아야 할 것들은 무엇이며 다시 채워야 할 것들은 무엇일까. 를 생각해본다.

세월의 흐름을 따라 육신이 피폐해지면 마음도 가벼워져야 한다. 연약해져가는 몸이 마음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안에는 내려놓지 못하고 있는 것들이 아직도 많다. 오히려 그 위에 하나 둘씩 욕심의 무게가 더해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싶어 안타깝다. 이미 일가를 이루고 살아가는 자식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마음에서 떠나보내지 못하고 있음도 그렇고, 내 힘으로는 도저히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세상 돌아가는 이런저런 일에 열을 올리는 바람에 때로는 남편에게 쓴 소리를 듣는 일만해도 그렇다. 글을 쓸 때는 또 어떠한가. 능력도 없으면서 잘 써야한다는 욕심이 앞서는 바람에 썼다 지우기만을 반복 할 뿐 한 줄의 문장도 완성하지 못할 때가 다반사이다. 시도 때도 없이 몸과 마음을 흔들어 대는 이런 자질구레한 일들로 해 어느 때는 몸이 마음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미열에 시달리기도 한다. 긴 세월을 살아 내는 동안 묵정밭처럼 황폐 해져버린 내 마음 밭도 기경하여 쓸데없는 아집과 집착의 덩어리들을 모두 부숴 버리고 순백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 날 수 있다면 참으로 좋으련만.

얼마를 달려 어디쯤 왔을까. 창밖엔 잠시 멎었던 눈이 다시 내리기 시작하고 있다. 차안을 흐르는 잔잔한 멜로디가 내 상념의 끝자락을 깨운다.

"곱고 희던 그 손으로 넥타이를 매어주던 때 어렴풋이 생각나오. 여보. 그 때를 기억하오. 막내아들 대학시험 뜬눈으로 지새던 밤 어렴풋이 생각나오. 여보. 그 때를 기억하오. 세월은 그렇게 흘러 여기까지 왔는데. 인생은 그렇게 흘러 황혼에 기우는데…"

김광석이 부른 '어느 노부부의 이야기"다. 노랫말이 가슴으로 젖어 든다. 지난 삶의 편린들이 오버랩 된다.

저만치 따뜻한 불빛이 보인다. 은은하고 부드러운 오렌지 빛깔이다. 아직 그 곳엔 가지도 안았는데 방금 갈아서 끓여 낸 원두커피의 부드러운 향기를 가슴으로 느낀다. 창밖엔 눈이 내리고. 마시지도 않은 커피 향에 취하고. 귓가에 대고 속삭여오는 우리 이야기 같은 노랫말 때문에 가슴 한 자락은 더욱 촉촉해져가고. 이 새벽 나들이는 우리의 삶을 더욱 향기롭게 하리라.


이 기자의 전체기사 보기 →

<저작권자 충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충북일보 / 등록번호 : 충북 아00291 / 등록일 : 2023년 3월 20일 발행인 : (주)충북일보 연경환 / 편집인 : 함우석 / 발행일 : 2003년2월 21일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무심서로 715 전화 : 043-277-2114 팩스 : 043-277-0307
ⓒ충북일보(www.inews365.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Copyright by inews365.com, In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