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보영
농익은 보리수 열매가 가지마다 풍성합니다. 오년 전인가요. 어린 나무 한그루를 심었는데 어른 키를 훌쩍 넘길 정도로 자라 품 넓은 나무가 되었습니다. 윤달이 들어서인가 지난봄은 유난히도 시린 바람이 부는 날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꽃 진 자리에 작은 열매들이 하나 가득 맺히더니 어느새 탐스럽게 익어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때를 따라 꽃을 피우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하는 자연의 어기찬 힘에 경이로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난봄은 내게도 시린 바람과 씨름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고된 나날이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 운영하고 있는 농원에 변화를 주기위한 새로운 시도가 시작되었기에 그랬습니다. 무엇인가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으로 마음이 늘 갈급하던 차에 우연찮게 새로운 시스템을 도입하여 열대수련을 키우는 한 육종가와 인연을 매게 된 것이 변화를 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2년여에 걸쳐 그가 개최하는 전시회를 돌아보면서 넓힌 식견을 가지고 우리의 남은 삶에 마지막 도전이 될지도 모른다 생각하며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시작을 하고보니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부부가 하고 있는 일 자체가 머리만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 일에는 노동이 수반되지 않으면 안 되었기에 노년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내외가 감당하기에는 참으로 벅찬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 전에 시스템을 완성하였고 지금 수저 안에는 아름다운 열대 수련들의 고운 자태가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잔잔한 수면위에서 그들이 뿜어내는 달콤한 향기와 수면 위를 수놓는 아름다운 모습이 가슴을 뒤 흔들어 놓습니다. 그간의 우리 노고에 보답이라도 하려는 듯 앞 다투어 피어나 눈웃음치는 저들을 보노라면 휑한 가슴 한 자락이 가득 채워지는 것 같습니다.
저들을 보며 생각해봅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가능성과 그를 향한 도전이 우리의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하는 것인가를 말입니다. 나이 듦이 두렵고 안타까워 도전을 멈추었다면 오늘의 이 소박한 기쁨을 소유하지 못했을 것이라 싶습니다. 5년 전 그 때 보리수나무를 심을 때도 언제 저 나무가 자라 열매를 맺어 줄 것인가 반신반의하면서 심었었는데 풍성하게 열매를 맺었고 열매를 채취해 지인들과 나눌 수 있었던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보리수나무 열매가 또 기관지에 그렇게 좋다고 하는 군요.
이봄에 시도한 새로운 일들도 어쩌면 무모한 도전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육신적인 힘겨움과 재정적인 부담을 감수하면서 행한 일들이고 이것들을 통하여 특별한 부가가치가 창출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다만 흙의 귀함도 모르는 초년병 정원사로 출발하여 10여 년의 세월을 보내면서 얻은 소중한 경험을 총 결산하는 의미에서 행한 일이기에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돌이켜보면 늘 꿈을 꾸며 꿈과 현실의 괴리를 극복하려 애쓰며 살아 온 나날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러다보니 긴 세월을 살아내면서 시행착오를 겪었던 일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또 다른 도전을 향한 밑거름이 되었고 오늘 우리가 새로운 일을 행하는데 주춧돌의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이제 우리부부에게 남은 삶이 얼마일지 알 수 없고 어떤 일들이 우리 마음을 흔들어 댈지 모릅니다. 그냥 마음이 가는대로 순리에 맡길 수밖에 없으리라 싶습니다.
한번 오십시오. 이제 오래지 않아 실크만큼이나 부드럽고 피어 있는 동안 세 번이나 색깔이 변하는 '에이트런', 그 유명하다는 '빅토리아', 밤에만 핀다하여 '야한연'이라 불리는 '야계화'가 필 것입니다. 오셔서 분주한 일상일랑 잠시 내려놓고 그들과 배화를 나누는 것도 좋으리라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