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당시 문의초등학교 4학년 이었던 송병성(82)씨는 일본인의 악랄함에 치를 떨었다.
"겨울에 양지바른 곳에서 햇볕을 쬐고 있을 때 일본인 교사가 줄넘기로 얼굴을 때리고 웃던 모습은 지금도 잊어버리지 못하고 있다"며 "일본인 교사는 제자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보다 제자를 노예나 노리개로 생각했던 것 같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송 옹은 "나는 해방당시 초등학교 4학년 이었다. 초등학교 입학시 시험을 봐서 합격해야만 입학이 가능했다"며 "아버지가 시험보기 전 나이와 이름, 주소 등을 일본말로 가르쳐 면접에서 합격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그는 "일제시대때 문의초등학교는 체육공원 아래에 있었다. 지금은 수몰로 터를 찾아 볼 수 가 없지만 추억은 간직하고 있다"며 "나는 해방되기 전까지 일본말이 우리말인줄 알았다. 한글이 있는 줄을 몰랐다"고 말했다.
이어 "일제시대때 학교 운동장에 다니는 길만 남겨두고 고구마와 토마토 등을 심었던 기억이 난다"며 "나는 당시 고구마를 처음봤다. 고구마를 심어놓고 일본인들은 해방이 되자 캐지도 못하고 모두 도망갔던 기억이 난다"고 덧붙였다.
또 "봄철에는 학교 등교할 때 쑥을 뜯어오라고 해 쑥으로 죽을 쑤어서 점심을 주기도 했다"며 "추운 겨울에 홑겹으로 된 옷을 입고 다녔던 기억이 난다. 모든 것을 일본인들이 모두 빼앗아 가고 겨울에는 개다를 신고 다녔다. 눈이 오면 눈이 바닥에 붙어 털고 다니기도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일본인들이 한국인을 노예처럼 부렸던 기억도 더듬었다.
그는 "학교 다닐 때 학생 1인당 가마니를 50매씩 배정을 해 학교에 가져갔던 기억도 있다. 가마니는 모두 수거해 일본인들이 전쟁에 사용했던 것 같다"며 이어 "싸리나무 껍질과 송진(광솔)을 모아 오라고 시켰던 기억도 있다. 송진을 학교에 가져가면 기술자들이 송진으로 기름을 짜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설명했다.
송옹은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도 한마디 했다.
"전라도에서 문의를 오가던 방울장수 아주머니가 있었다. 그분이 우리집에서 묵어가면서 하소연 하면서 하시던 말이 지금도 기억이 난다"며 "밭에 점심을 해서 가지고 갈 때 어린딸이 주전자에 물을 떠서 뒤를 따라 올 때 일본인 순사가 딸을 잡아가 지금까지 소식이 없다며 울면서 하소연 하던 생각이 난다"고 어린소녀들까지 위안부로 끌려간 상황을 설명했다.
이어 "일본은 한국인들을 이렇게 고생시켜놓고 지금도 반성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은 세상이 다 알고 있다. 천벌을 받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해방후 한국인 선생님이 이제는 한글을 배워야 한다며 '기역 니은'을 가르쳤다. 1학년부터 6학년까지 모두 '한글 첫걸음'이라는 책을 다같이 배웠다"며 "당시 학교에서 나눠준 한글첫걸음 이라는 책을 지금도 가보로 보관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