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되던해 삼산초 3학년이었던 김권수(78)씨는 "아침에 일과시작전 일본천황에게 인사를 먼저하고 공부를 시작했다"며 "학교에서는 일본말, 집에서는 한국말을 사용했다. 처음에는 무슨 말 인지 알아듣지도 못하고 통하지도 않아 학교생활이 두려움과 긴장의 연속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학교에서 일본말을 잘못하고 실수를 범하면 선생이 신고있던 끌신으로 학생의 빰을 사정없이 때렸으며 군대처럼 운영됐다"며 "또 선생님이 하라는 대로 무조건 복종을 해야 했돈 그 시절의 학교생활은 공포의 연속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어 "대부분의 학생들의 옷차림은 솜바지에 저고리를 입고 다녔으며 짚신과 게다 또는 검정고무신을 신었고 1년에 몇차례씩 공습경보 발령이 떨어지면 수업도중에 책보를 싸서 집으로 돌아가는데 신발끈이 떨어지면 겨울에 맨발도 걸어가던 생각이 난다. 지금 생각하면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그 당시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고 고통을 토로했다.
특히 "일주일에 한번씩 쇠붙이, 놋쇠, 수저, 솥단지 등을 모아 학교로 가져가 바쳐야했다"고 말하며 "일본 선생들은 이것으로 무기를 만들어 전쟁에서 이겨야 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심지어는 성과 이름까지 개명했다"고 회고했다.
또 "해방되던 날 곳곳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거리에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 궐기대회를 하며 여러날을 괭과리 치며 좋아했던 그날의 함성이 아직도 귓전에 울리고 있다"고 회상하며 "그때 '대한독립만세' 소리를 처음 들었고 알게 됐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삼산초 교사를 지내기도 했던 김권수씨는 정신적인 지주로 5학년때 담임이었던 임형순 선생과 6학년 담임이었던 원형낙 선생을 들고 있다.
그는 "5,6학년때 한국인 은사님들이 민주적 지도가는 떠난 뒤에 자국을 남기기 않는 것이라고 말한 것을 좌우명으로 삼고 살아왔다"며 "모교에서 10년간 교사로 근무하면서 이 말 뜻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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