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마을 울타리에 붉은 장미꽃이 피었다. 20여 년 전 장미꽃이 피던 어느 날, 그녀는 홀로 세상을 떠났다. 매년 이맘때가 되면 나는 그녀 산소에 벌초한다.
그녀는 열아홉에 보은군 수한면 질구지에서 우리 마을로 시집왔다. 그래서 택호가 질구지 댁이다. 결혼 후 몇 해 지나도 자식이 없자, 남편은 첩을 들이고 아들을 낳았다. 자기 배로 낳은 자식은 아니라도 친자식처럼 귀하게 키웠다.
그러던 중 동족상잔의 비극 6·25가 터졌다. 당시 농사만 짓던 남편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보도연맹에 가입하였다. 산골 논에서 모내기하다 지서 순경에게 붙잡혀 갔다. 그 후 생사도 모르고 몇 년이 지났다. 소식이 없자 붙들려 간 날짜에 제사를 지냈다. 최근에 알려진 바로는 청성 지서에서 옥천경찰서로 붙잡혀 가고, 동이면 평산리나 군서면 월전리서 경찰에게 집단학살 당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녀는 남편이 보도연맹으로 잡혀가 생사도 모르며 평생을 보냈다. 어린아이 키우며 혼자 농사일에 땔나무까지 갖은 고생을 다 하며 근근이 살았다. 자식은 겨우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시골에서 농사를 지었다. 보도연맹 자식이라 내놓고 이야기도 못하고 신원조회 때문에 취업도 어려웠다. 결혼하고 어쩔 수 없이 건설 현장 막노동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얼마 후 멀쩡하던 며느리마저 충격을 받고 그만 남편 곁으로 갔다. 졸지에 자식과 며느리를 모두 잃고 어린 손자 손녀만 남게 되었다. 손자들도 넉넉지 못한 가정형편 때문에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다. 가난은 자연스럽게 대물림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시골 형님으로부터 급한 전화가 왔다. 그녀가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손자들은 아직 어리기에 장례를 치를 형편이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과 정성껏 양지바른 곳에 모셨다. 그녀를 보내던 날 마을 사람들 모두가 슬픔에 눈물을 흘렸다.
몇 개월이 지난 주말, 고향 둘째 형님 집에 들렀다. 그날따라 한잔하신 형님이 "그녀는 그냥 돌아가신 것이 아니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였다"며 털어 놓았다. 형님은 그날따라 찜찜해서 아침 일찍 그녀 집에 들렀다. 인기척이 없어서, 방문을 열어보니 천정에 목을 맨 채로 하늘에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당신이 아파 누워 있어도 누구하나 돌봐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어린 손자에게 피해주지 않으려고 스스로 극단적인 방법으로 생을 마감한 것이다.
열아홉에 시집와 내 배로 난 자식 하나 없이, 남편은 6·25 보도연맹으로 끌려가 생사도 모르고 혼자 청춘을 보냈다, 첩의 자식 하나 금이야 옥이야 키웠더니 먼저 떠나고, 며느리까지 앞에 보내는 기구한 질곡의 삶을 살다 홀로 떠났다. 삶을 스스로 마감하는 마지막 순간, 얼마나 고독하고 마음이 아팠을까, 생각만 해도 가슴이 저며 온다.
보도연맹 그 자체가 뭔지도 몰랐고, 그 당시 시골에서 말 꾀나하는 사람은 별생각 없이 가입했다고 한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정부가 후퇴하면서 아무런 법적 절차도 없이 국민을 집단 학살한 것이다. 적어도 20~30만 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도올 김용옥 선생은 옥천이 낳은 현대시의 거장 정지용 선생도 보도연맹으로 희생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이때 유능한 인재들이 모두 죽임을 당함으로써 인재의 빈곤이라는 어처구니없는 국가적 손실을 초래했다.
6·25 전쟁만 없었어도 그녀의 남편은 살아서 평범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녀도 이렇게 힘든 생을 살다가 외롭게 생을 마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보도연맹과 같은 불행한 사건은 다시는 발생하지 말아야 한다. 개인에게 주는 고통과 피해는 당대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 자손들까지 세습되고 있는 것이 더 큰 문제다. 6월이 되면 고향마을에 붉은 장미꽃이 피어난다. 이 장미를 볼 때마다 그녀가 보고 싶다. 그래서 매년 이맘때가 되면 그녀의 산소에 벌초하면서 무거운 침묵의 대화를 혼자 나누게 된다. 보도연맹!. 아직도 그 아픔은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