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눈물(雪水)

2024.01.25 14:23:43

신한서

전 옥천군 친환경 농축산과장

대설(大雪)도 지나고 12월도 허리를 지나 가슴까지 올라왔다. TV에서 노란 우산을 쓴 기상캐스터가 일기예보를 한다. 폭우와 폭설 주의보를 동시에 발령한다. 이어서 주말에는 한파주의보까지 예보한다.

주말 오후 면회차 요양병원에 들렀다. 온 가족들이 다 모였다. 가족들의 위치를 보면 대충 촌수가 나온다. 침대 옆에 바싹 붙어 눈물 콧물 흘리며 이것저것 챙기는 것은 딸이다. 입원한 부모를 가끔 찾아와 준비해 온 반찬이며 죽 등을 떠먹이는 것도 딸이다. 그 옆에 엉거주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 있는 사람은 십중팔구 사위다. 아들은 병실 문간쯤에서 먼 산만 바라보다 잠시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는다. 딸이 사 온 음료수 한 병 까먹고 어디론가 사라진다. 며느리는 병실을 들락거리다 복도 의자에 앉아 휴대폰 만 들여다보고 있다.

초고령화 사회로 접어든 오늘, 창살 없는 감옥에서 의미 없는 삶을 연명하며 하루하루 보내고 있는 어른들이 많다. 그들도 자신의 말로가 이렇게 될 줄은 미처 몰랐을 것이다. 요즘은 누구나 자신이 원하건 원하지 않건 요양병원 신세를 진다. 자식이나 마누라가 있건 없건, 돈이 있건 없건, 잘났건 못났건 대부분 요양병원에서 생을 마감한다. 천하의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도 몇 년간 삼성병원 특실에서 식물인간으로 연명하다 결국 생을 마감했다. 필자는 요양병원에 들어갔다가 건강이 호전돼서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는 사람을 아직 한 명도 보지 못했다. 고려 시대에는 60세가 넘으면 자식이 부모를 지게에 지고 산에 가서 생매장했다는 고려장 풍습이 전해지고 있다. 누구나 한번 들어가면 다시는 살아 돌아오지 못하는 곳이 바로 요양병원이다. 현대판 고려장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곳은 가고 싶다고 가고 가기 싫다고 가지 않아도 되는 곳이 아니다. 늙고 병들어 정신이 혼미해지면 누구나 그곳으로 갈 수밖에 없다. 산 사람은 또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누구나 다 그곳으로 갈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한 살이라도 젊고 두 다리 멀쩡할 때, 맛있는 것 먹고, 가고 싶은데 가면서 즐겁게 살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몇 개월째 요양병원에 입원한 어느 아버지가 병이 매우 깊었다. 어머니는 지극정성으로 아버지 곁을 지켰다. 어느 날 저녁 막내딸이 찾아왔다. 지방에서 올라온 딸이 아버지 손을 잡고 한참을 울었다. 아버지는 눈을 감은 채로 아무 말이 없었다. 막내딸은 2일 동안 아버지와 함께 병실에서 잠을 잤다. 주말 오후 "아빠 나 이제 가 봐야 하거든, 김 서방 출근시켜야 하고 아이들 학교도 보내야 해."하며 그녀는 나무껍질 같은 아버지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눈을 감은 아버지는 딸의 흐느끼는 소리에도 아무 말이 없었다. "아빠, 나 이제 갈게, 꼭 다시 일어나야 해, 아빠, 꼭." 옆에 있던 엄마가 딸의 손을 끌었다. 어서 가거라, 네 아버지 다 알아들었을 거다. 엄마는 딸을 데리고 병실 밖으로 나갔다. 딸을 보내고 눈물을 닦으며 병실 안으로 들어와 혼자 중얼거렸다. "이제, 제 아버지 눈이나 감으면 오겠지, 아버지를 끔찍이 좋아했는데," 바로 그때였다. 침대에 누워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아버지가 모기소리 처럼 "임자,임자" 하며 엄마를 부른다. 아버지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일으켜 달라고 한다. 엄마의 부축을 받으며 아버지는 창가 쪽으로 간신히 걸어간다. 아버지는 힘겨운 숨을 고르며 창밖을 살폈다. 마침 정문 쪽으로 눈비를 맞으며 걸어가는 막내딸의 뒷모습이 보였다. 한겨울에 눈은 오지 않고 진눈깨비가 쏟아진다. 아버지는 오른팔을 간신히 들어 딸의 뒷모습을 어루만지듯, 눈물(雪水)이 흘러내리는 유리창을 쓰다듬는다. 딸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는 아버지의 눈가에는 닭똥 같은 눈물이 주르륵 흐른다. 창밖의 눈물(雪水)과 아버지의 마지막 눈물이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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