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처럼 밀려오는 그리움

2024.07.04 18:06:56

이명순

수필가·한국어강사

(오피)이명순(아침)

파도처럼 밀려오는 그리움

여행이 주는 설렘과 낯선 곳에서 새로운 경험을 즐기는 편이다. 하늘빛도 다르고 바람의 결도 다르다. 거리와 나무들도 새롭고 음식도 새롭다. 지인들과 웃고 떠들며 이국의 풍경을 눈에 담을 수 있기에 여행을 좋아한다.

화려한 불빛이 일렁이는 바다 가운데로 불현듯 남편의 얼굴이 떠올랐다. 남편은 환갑을 넘긴 다음 해에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환갑 기념으로 가족 여행을 가기로 했는데 세상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여행을 접어야 했다.

남편은 고관절 수술을 한 후로 걷는 게 불편했다. 그렇기에 해외여행은 꿈도 꿀 수 없었는데 아픈 다리가 나아지며 준비한 환갑 기념 가족 여행을 하늘은 허락하지 않았다. 코로나 시국이 끝나가서 다시 여행을 계획했는데 이번에는 부신암이라는 더 강력한 불청객이 찾아왔고 진단받은 지 겨우 두 달 만에 이 세상 소풍을 끝냈다.

급작스런 발병과 이미 깊어진 병세로 인해 제대로 치료도 못했다. 부신암은 흔치 않은 병증이라 치료 약도 많지 않았다. 남편은 연명치료도 포기하며 자신의 운명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그렇게 세월이 지났고 떠난 사람의 자리가 아무리 커도 남은 사람은 어떻게든 살 수밖에 없도록 삶의 바퀴는 무심하게 굴러갔다.

지난 몇 년간 남편의 부재로 인한 공허함을 안고 살다가 내 환갑이라고 나는 먼 호주 땅에 와 있는 불편한 삶의 모습이 얼마나 부질없는지 새삼스럽다. 한 번이라도 더 같이 여행했었다면 지금의 아쉬움이 덜했을지 알 수 없지만 여행 기간 내내 시드니 곳곳을 다니며 남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시드니 울릉공 남쪽에 키아마란 작은 도시가 있다. '바위에 부딪히는 하얀 파도'란 예쁜 의미가 있는 키아마에 가면 등대 부근에 위치한 블러우홀에서 울퉁불퉁한 바위 사이로 파도가 밀려 들어와 분수처럼 위로 솟구치는 멋진 장관을 볼 수 있다. 멀리 바다에서 밀려온 파도가 바위 구멍으로 들어왔다가 사방이 막혀 있으니 한순간 위로 솟구친다.

바람이 거세게 부는 날에는 60m 높이까지 올라오는 멋진 풍경을 보려면 기다림이 필요하다. 잔잔한 바다와 달리 파도는 거세게 몰아친다. 솟구치는 하얀 파도가 내 가슴 깊은 곳에 뭉쳐졌던 감정의 응어리처럼 차고 올라와 사방으로 흩어졌다. 파도에 밀려오던 내 슬픔도 잠시 뒤로 주춤하는 것 같았다.

바닷가에서 화강암 돌들을 밟고 섰다. 바람이 거세다. 파란 하늘과 푸른 바다가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데 내 가슴에는 격랑의 슬픔이 몰아친다. 밀려오는 그리움에 가슴이 먹먹하고 슬펐다. 찬 바람을 맞으며 잠시 그대로 서 있었다. 블러우홀에서 거세게 역류하던 파도가 일순간 잠잠해지자 나도 다시 평온해졌다.

지금의 삶도 돌고 돌면 언젠가 그리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으려나 막연한 생각을 하며 해안을 걸었다. 하얀 등대가 그림처럼 서 있고 푸른빛 자연이 상처 난 마음을 어루만진다. 이름 모를 꽃과 귓가를 스치는 바람에 머릿속을 비우며 여행을 즐겼다. 적막한 집에 들어오면 늘 골짜기에 부는 바람처럼 한줄기 외로움이 몰아쳤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남편에 대한 그리움, 슬픔, 미안함, 허전함을 이제는 조금씩 바람에 날려 보내야 한다.

남편의 부재는 모든 게 아픔이고 상처였는데 먼 나라를 여행하며 내 아픔의 상처도 조금은 치유된 것 같다. 슬픔과 아픔은 삭여내고 푸른 바다의 하얀 파도처럼 밀려오는 그리움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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