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치 앞이 어둠

2023.10.03 15:19:59

이명순

수필가·한국어강사

어느새 가을이라 밤바람이 차다. 계절의 순환은 늘 그렇듯이 순리대로 움직이는데 우리네 삶은 한 치 앞을 예측하기 힘들다. 요즈음 연이어 안 좋은 소식들이 전해져 우울했다.

한국어 수업에 빠짐없이 참석하는 레나씨는 캄보디아에서 온 결혼 이주여성이다. 어쩌다 결석하게 되면 항상 메시지를 보내 참석할 수 없음을 알려준다. 한국어도 빠르게 습득했고 발음도 좋은 편이다. 얼마 전에는 국적 취득 시험도 합격했다며 메시지를 보내서 기쁜 마음으로 축하해 줬다. 그리고 가족들과 늦은 휴가도 다녀온다던 그녀가 오전 수업에 안 와서 궁금했는데 점심 때쯤 연락이 왔다.

남편이 뇌출혈로 쓰러졌다고 한다. 119로 급하게 이송해 응급 수술을 했는데 하루가 지난 오늘까지 의식이 없다며 울먹거린다. 한밤중에 자다가 일어난 일이라 어떻게 해 볼 방법이 없었다고 한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내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누가 아프다는 말만 들으면 내 마음이 불안하고 가슴이 먹먹해지는 증상이 생겼다.

제발 무소식이 희소식이려니 하며 하루하루를 지내는데 들려오는 소식은 절망적이었다. 결국 그녀의 남편은 끝내 의식을 찾지 못하고 5일 만에 다시 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나 버렸다. 착한 아내와 네 살짜리 아들을 두고 어찌 그리 허망하게 길을 떠났을까 생각하니 암담했다.

멀리 타국에서 남편만 보고 이곳에 와 정착했고 이제 국적도 취득해 한국인으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려는 그녀에게 너무나 가혹한 형벌이었다. 남편 나이도 40대 초반으로 아직은 너무나 젊었다.

그런데 지난달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같은 나라에서 온 결혼 이주 여성인데 남편이 샤워 중에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두 아이를 두고 다시 올 수 없는 길을 떠나 버린 것이다. 누가 어떻게 해 볼 시간도 기회도 없었다. 역시나 아직은 젊은 남편이다.

두 여성이 타국에서 겪을 외로움, 무서움, 암담함, 절망 등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만 떠올랐다. 그녀들에게 또 다른 가족이 있으니 위로가 되겠지만 남편의 빈 자리를 대신 채울 수는 없을 것이다.

나도 같은 일을 겪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어두운 터널 속을 어떻게 걸어 나왔는지 생각도 안 난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니 나를 견디게 한 힘의 원천은 두 딸이었다. 아빠 잃은 슬픔을 추스르기에 딸들도 힘들었다. 하지만 혼자 지낼 엄마를 걱정해 둘 다 매주 집에 왔다. 큰딸은 주중에 작은딸은 주말에. 매주 버스를 타고 오기에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으니 몸도 마음도 얼마나 힘들었을까. 우리는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야만 견딜 수 있는 시간이었다.

갑작스러운 남편의 부재 속에서 그녀들은 앞으로 강해져야 하고 어린 자녀들도 잘 키워내야 한다. 매우 힘들고 외롭겠지만 지금 걷고 있는 이 어둠의 터널을 걸어 나와야 밝은 빛의 세상을 만날 수 있다. 시련은 지독하게 아픈 형벌일지라도 잘 견뎌낼 수밖에 없다.

두 딸이 내게 힘이 되었듯 그녀들도 지금의 힘듦을 치유하고 밝게 웃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스쳐 지나가는 바람도 누군가에게는 아픔일 수 있고 마음의 상처는 시간이 지나야 치유된다. 한 치 앞을 모르는 게 우리네 삶이라지만 시간이 얼마나 흘러야 상처가 아물지 지나가는 바람에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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