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부장의 설날 넋두리

2015.02.15 14:44:49

윤상원

영동대학교 발명특허학과 교수·사단법인 한국발명교육학회 회장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가슴이 설렌다. 내일 모래가 우리 민족 최대의 명절이라서다. 그러나 속은 영 편치 않다. 새해 들어 직장 분위기가 심상찮다. 올 설 명절에는 보너스가 없단다. 대충 작은 선물세트 하나로 땜질 할 모양새다. 불황 탓이다. 구조조정 안 당한 것만 해도 천만다행이다.

사장은 사원들에게 줄 설 연휴 보너스 문제로 고민이 깊다. 돈 들어갈 곳은 한둘이 아닌데 자금 마련이 쉽지 않은가 보다. 마음은 있지만, 현실은 정반대니 죽을 맛이다. 자금을 구하려고 백방으로 뛰는 모습이 딱하기만 하다. 은행 문턱은 너무 높다. 영세 중소기업이 금융권에서 자금 빌리기는 하늘의 별 따기보다 더 어렵다고 하니 말이다. 사채에 눈독들일까 봐 걱정이다. 이웃의 한 중소기업 사장도 상황은 마찬가지. 설 자금 부족 현상은 영세업체일수록 심하다.

손꼽아 기다리던 설 연휴지만, 나에게도 경제적인 상황은 호전될 기미가 없다. 씀씀이가 많기 때문이다. 보너스가 안 나오니 없는 살림에 제사상 비용도 만만치 않아, 미리부터 아내는 긴 한숨이다. 아내의 기죽은 모습에 괜스레 마음이 서글퍼진다. 고향에 계신 부모님 설 선물비용은 어떻고. 부모와 처가댁 눈치까지 봐야 할 판이다. 올해 중·고등학교에 입학하는 조카들 세뱃돈은 부담 백배다. 몇십 만원은 기본이다. 빚을 내서라도 줘야 하는 입장이다. 한마디로 겁난다. 이번 연휴는 주말까지 붙어 있어 길게만 느껴진다. 어디로 피해야 할지 걱정이 앞선다.

13월의 보너스로 기대하고 계획을 세웠던 연말정산 세금 폭탄은 화를 돋군다. 국민들의 비난을 피해 슬그머니 후퇴하는 정부의 대충대충 정책은 또한 사람의 혈압을 올리게 한다. 민심이 싸늘하다. 대중교통 요금과 상하수도 요금, 고속도로 통행료 등 공공요금은 또 언제 오를지. 요금인상은 영세 중소기업엔 쥐약이다. 모두 전전긍긍이다. 구정 명절 기분 다 망쳤다. 결국, 소득을 숨길 수 없는 봉급생활자에게는 왕짜증을 넘어 허탈함이 앞선다. '화병'을 치유할 비상약도 없다.

대기업 다니는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이 녀석은 3박 4일 일정으로 식구들과 함께 필리핀 '세부'로 가족여행을 떠날 계획이란다. 한국의 추운 겨울을 피해 따뜻한 남쪽 나라로 해외여행을 가려는 여행객들이 넘쳐난다는 소식까지 전한다. 목소리에서 넉넉함이 묻어난다. 친구와의 급여 차이는 자괴감을 느끼게 한다. 우리나라는 4명 중 1명이 저임금 근로자란다. 시간이 지날수록 빈익빈(貧益貧) 부익부(富益富)가 점점 심해지고 있다. 사회적 계층 이동이 점점 힘들어짐을 몸소 체험하고 있다.

나는 중소기업의 박봉 월급쟁이 '박봉수'다. 학교 다니는 자녀들의 사교육비 조달에 '여행'이라는 글자를 잊은 지 오래다. 나는 더는 중산층이 아니다. 빚쟁이로 곧 추락할 것 같다. 빚 없이는 자녀교육이나 생활비 충당이 힘들기 때문이다.

어제는 박봉이 지긋지긋하다고 사표 던지고 창업한 친구를 만났다. 망했다는 이야기다. 요 녀석은 학창시절에 꽤 똑똑했던 친구인데, 사업 망하고 나니 몰골이 말이 아니다. 자기 주변에는 폐업자들이 널렸단다. 40대가 폐업의 중심축이 되고 있다니 말도 안 된다. 산업 현장의 일자리 부족은 실업자의 속마음을 태운다. 속으로 꾹꾹 눈물을 삼키는 친구의 모습이 안쓰럽다. 이 친구에게는 작은 일자리가 절실하다.

한국 경제의 허리가 40대 아닌가. 휘청거리고 있는 허리에서 무슨 큰 힘을 기대하랴. 정녕 한국의 저력(底力)은 여기까지이었던가.

구정 명절 즈음, 한 40대 가장의 속내를 최근 국가경제지표를 중심으로 꾸며본 가상 인물 이야기다. 대한민국의 주인은 민초(民草)다. 민초가 우뚝 서야 나라의 중심이 서는 법이다. 정부와 정치권은 귀를 활짝 열어 그들의 고달픈 애환을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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