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친절한 배신자'는 요즘 인기리에 방영중인 드라마 제목이다. 이 드라마는 부모가 자식을 믿지 못해 발생하는 사건을 다루고 있다. 드라마를 보게 되면 모든 문제는 불신으로 인한 오해와 의심 그리고 확신에서 생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들과 관계 맺음을 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드라마의 내용처럼 서로를 불신하기도 하는데, 그 불신이 오해와 의심으로 발전하게 되면, 결국 오해와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게 되면서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이토록 친절한 배신자'라는 드라마는 바로 이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불신으로 인한 오해와 의심 그리고 확신이 인간관계에서 얼마나 많은 문제가 되는지를 지적하고 있다.
유교에서 오륜(五倫)의 덕목 중 하나가 붕우유신(朋友有信)이다, 여기서 붕우를 한자의 자구(字句)대로만 해석하면 친구를 말하는 것이지만 사실은 사회적 관계를 말하는 것으로 확대해석해도 무방하다. 그렇다면 붕우유신은 사회적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이 신(信)이라는 의미이다. 신(信)이라는 한자는 사람(人)과 말(言)의 조합으로 결국 믿음은 사람의 말에서 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토록 친절한 배신자'라는 드라마에서 아빠인 장태수가 딸에게 이렇게 말을 한다. "왜 엄마와 너는 나한테 아무 말도 하지 않니?"라고 묻는다. 그러니까 딸은 "믿을 수 없으니까"라고 대답을 한다. 이처럼 믿음이 없는 사람과는 말을 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믿음이 없는 관계는 이미 관계의 끈이 끊어진 상태이고, 그들 사이에는 사회적 관계의 주고 받음, 즉 기브앤 테이크(give and take)가 없는 관계라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믿음이 없는 사이에서는 어떤 말도 서로에게 공허한 메아리가 될 수밖에 없다.
얼마 전 본 뉴스 기사 중에 교권침해로 최근 1년간 퇴직한 교사가 1만2천 명이라는 내용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5년 미만의 초·중·고 교사는 589명으로 이전에 1년간 퇴직한 근속 5년 미만 교사 303명과 비교해 보면, 약 1.9배 증가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교권보호 5법이 국회를 통과했음에도 교권침해는 줄어들지 않고 있고, 교사들을 탈출구가 없는 막다른 골목으로 내 몰고 있다.
문득 궁금해진다. 교권보호 5법이 국회를 통과한지 1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왜 교권침해는 줄어들고 있지 않는 것일까. 법은 문제가 발생했을 때 처벌의 효과는 있지만 교권침해의 원인을 해결해 주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박에 없다. 만약 법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었다면, 아마도 우리 사회에서 모든 범죄는 사라졌을 것이다, 따라서 교권보호 5법을 통해 교권침해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제대로 된 처방이 아니다. 교권침해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교권침해가 발생하는 원인을 찾아 그 원인을 해결해야 한다.
그렇다면 교권침해는 왜 발생하는 것일까. 그것은 교사를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교사에 대한 믿음이 없으니 교사와 학부모 사이의 관계는 종교철학자 마틴 부버가 말한 나와 너의 관계에서 나와 그의 관계가 된 것이다. 아니 더 나아가서는 나와 적의 관계가 된 것이다. 이렇다 보니 교사의 말과 행동은 자신들을 공격하는 말과 행동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고, 당연 학부모는 이를 방어하기 위해 공격을 멈출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제 수능이 2주 앞으로 다가왔다. 이번에는 감독교사에게 명찰대신 번호를 착용하게 한다는 기사도 있었다. 그 이유는 작년 수능 때 감독교사가 학생의 부정행위를 적발하였는데 그 부모가 감독교사의 이름으로 근무하는 학교를 알아내고 찾아가 행패를 부렸기 때문에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러한 일련의 행동도 궁극적으로 보면 서로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교사에 대한 불신은 오해와 의심으로 교사에 대한 잘못된 확신을 갖게 되고 이는 서로를 존중하기 보단 서로를 적대시 하게 되며, 결국 교사의 권위조차 부정하게 만든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토록 친절한 배신자'가 아닌 '이토록 친절한 동반자'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